[ 이병철회장의 외화 조달방안 ]

지난 63년말 제3공화국 출범을 앞두고 경제인협회가 발표한 "한국경제의
진로"는 당시 경제 참상을 감안해야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해 12월 총리 물망에 올라 있던 정일권과 장기영(당시 한국일보사장)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나하고 같이 내각에 들어가 일해 봅시다"

장 사장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지금 워낙 난장판이라..."

정일권은 흉흉한 경제상황을 다시 강조해 설명한다.

"혁명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가난을 몰아 내려 애썼습니다.
농어민의 고리채를 덜어 주려고 해봤고, 통화 개혁으로 경제체제를 다시 구축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경제사정은 좋아지지 않고 민심은 붕 떠
있습니다"(끝없는 전진, 장기영 일대기. pp.203~204)

굶주리고 힘없는 백성들을 무엇보다 피말리게 하는 것은 막연한 불안감이다.

63년~64년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들에게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길을 제시한
게 바로 경제인협회의가 제시한 "한국경제의 진로"다.

갈 길을 확실히 펼쳐 보이면 국민들은 희망과 용기를 되찾게 될 것으로 생각
했다.

더욱이 협회가 제시한 진로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마련된 것이다.

다시 말해 60년대는 물론 70년대 "고도성장-한강의 기적"에 대한 비전과
전략 기법까지 포괄적으로 열거했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은 시대를 앞서가는 "길잡이"였다.

물론 학계.기술계 의견은 "한국경제.기술 조사센터"를 통해 수렴했다.

또 수출제일주의의 선각자인 전택보사장, "공업화의 기수" 이병철 회장의
구상이 구체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필자 또한 우리 경제의 청사진(한국경제의 진로)을 마련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필자 인생에서 이 때만큼 열정을 다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선출되고 제3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러나 경제상황은 오리무중, 악화일로에 있었다.

당면 경제 상황뿐 아니라 장기전략도 혼선을 빚었다.

"제1차 5개년계획 중단"내지 "대폭수정론"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국경제의 진로"에 담긴 색다른 내용과 표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우선 전환기에 선 한국경제의 핵심 과제는 "18년간 외원 의존 경제에서
급속한 자립경제로의 전환"이라고 경제인협회는 앞질러 제시했다.

따라서 한해에 최소한 4억달러 이상의 외화를 획득해야 하고,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도 담았다.

수출1억달러도 안되는 상태에서 어떻게 2, 3년내 4억달러 수출이 가능할까.

"보세가공 수출의 창시자" 전택보 사장은 그 가능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64년1월 경향신문) "홍콩 인구는 3백50만명인데 한해 수출이 연간
7억달러이고 그 중에서 5억달러가 홍콩 생산이라 하니 그 정도의 수출을
한국이 못할 리 없다" 전사장은 이미 보세가공 수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보세가공 수출제품의 원가를 이렇게 분석했다.

수입원자재 3분의1, 노임 3분의1, 기타 부대비용 및 이익 3분의1.

당연히 3분의2가 국내에 과실로 떨어지는 것으로 봤다.

자기가 현재 수출하고 있는 것과, 구상하고 있는 것들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소신있게 주장했다.

"체험자는 말한다"는 격언처럼 전사장의 실천에 근거한 설명이기에
설득력과 무게가 있었다.

이런 전택보씨를 두고 슘페터가 말하는 "기업가 정신"을 연상하곤 했다.

수출로 4억달러를 가득하게 되면 외국 원조 없이도 현 경제의 국고를
유지할 수 있다고 치자.

그 이상 경제를 발전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이병철 회장은 "우리가 잘 사는 길"(63년5월31일~6월1일,
한국일보)에서 그 방법을 상세히 제시했다.

5.16 군사정부는 62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성급히 시작했으나 자원 조달책은
없었다.

다만 "통화개혁"(62년6월10일)을 단행해 사장된 돈을 동원하려 했으나
완전 실패로 악성 인플레이션만 촉진시켰다.

설상가상으로 박정희의 "군정연장"기도에 미국정부는 "원조중단"까지
내비쳤다.

이대로 가면 한국경제는 그대로 주저앉고 마는 절대 위기에 처했다.

이를 좌시할 수 없어 이 회장은 한국일보에 5회에 걸친 긴 글을 기고했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이회장이 제시한 "잘사는 길"은 그 분의 성품 그대로 빈틈없이 논리 정연
하다.

당시 "국민소득 78달러를 1백달러 더 증가시켜 1백78달러로 높여야 한다"고
우선 주장했다.

이는 필리핀이나 터키 수준에 불과하지만 5개년 계획이 제시한 것보다 훨씬
높다.

이쯤 돼야 "생활안정선"이라고 이 회장은 여긴 것같다.

문제는 투자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이다.

그 해결책을 기업가인 이 회장이 경제전문가 이상의 수치를 들어 설명한다.

"3년전부터 미 원조가 줄고 있다. 이 감소액을 차관으로 메워 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공산주의를 물리치겠다는 의지를 확립하고 조야가 합심 노력
하면 과거보다 많은 미국 차관 기금의 10%, 즉 1억달러는 매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앞으로 한.일 회담이 성사되면 10년간 6억달러를 도입할 수
있다. 이밖에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10년간 5억달러를 들여오는
등 앞으로 10년간 총 20억달러 이상의 외자를 도입할 수 있다. 이 재원으로
4백만달러 규모의 공장 1천개를 건설, 평균 5백명을 고용하면 연관산업 및
부양가족까지 합쳐 5백만명의 고용 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국민
소득 1백달러 증가는 무난할 것이다"

삼성 회장실에서 종이에 연필로 일일이 계산하면서 필자에게 설명하시던
이 회장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