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운보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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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화백은 191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학과 서예를 배우고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등교 첫날
장티푸스에 걸려 청각을 잃었다.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에 들어간 이듬해인 31년 조선전람회(선전)에 첫출품
한 "판상도무"가 입선된 뒤 연속 입상해 41년 선전 추천작가가 됐다.
광복후 아호를 운포에서 포의 테두리를 벗겨낸 운보로 바꿨다.
그는 20세기 한국화단의 거봉이자 신체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의 예술가다.
60여년동안 놀라운 정열과 풍부한 실험정신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과
방법을 모색,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다채롭고 풍부한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흰고무신에 정열과 투지를 나타내는 빨간 양말을 신고 작업에 몰두, 국내
작가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1만여점의 작품을 그렸다.
30년대 세필의 미인도와 화조도에서 50년대 입체파적인 성화와 탈춤 연작,
60년대 추상적인 문자화, 70년대 현대적이며 역동적인 청록산수와 바보산수를
거쳐 80년대말 대걸레붓을 사용한 점과선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구상과 추상,
동 서양화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특히 민화의 현대적 수용을 통해 한국인의 미감과 정서를 표현한 "바보산수"
는 호방한 필치와 화려한 색채, 해학적인 표현으로 그림 문외한들에게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다.
운보는 또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장애자들의 복지 증진에
앞장섰다.
한국농아복지회장을 맡아 농아복지회관을 짓고 재활훈련원을 운영했으며
장애자를 위한 일이라면 아무리 비싼 작품도 서슴치 않고 내놨다.
유명세인가, 작품의 인기 탓인가.
그림도난 사건만 나면 오르내리더니 이번엔 다시 신동아그룹 최순영회장이
구속 직전 그의 그림 60억원어치를 샀다고 해서 난리다.
투자차 혹은 미술관 준비용이라는 신동아측 주장과 달리 로비용이라는 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수사가 진행중이다.
따뜻한 마음의 위대한 예술가 운보는 지금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먼저간
아내 우향을 만날 채비를 하고 있다.
내용이야 어떻든 욕심으로 얼룩진 사람들때문에 노대가의 마지막 가는 길이
어지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3일자 ).
서당에서 한학과 서예를 배우고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등교 첫날
장티푸스에 걸려 청각을 잃었다.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에 들어간 이듬해인 31년 조선전람회(선전)에 첫출품
한 "판상도무"가 입선된 뒤 연속 입상해 41년 선전 추천작가가 됐다.
광복후 아호를 운포에서 포의 테두리를 벗겨낸 운보로 바꿨다.
그는 20세기 한국화단의 거봉이자 신체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의 예술가다.
60여년동안 놀라운 정열과 풍부한 실험정신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과
방법을 모색,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다채롭고 풍부한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흰고무신에 정열과 투지를 나타내는 빨간 양말을 신고 작업에 몰두, 국내
작가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1만여점의 작품을 그렸다.
30년대 세필의 미인도와 화조도에서 50년대 입체파적인 성화와 탈춤 연작,
60년대 추상적인 문자화, 70년대 현대적이며 역동적인 청록산수와 바보산수를
거쳐 80년대말 대걸레붓을 사용한 점과선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구상과 추상,
동 서양화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특히 민화의 현대적 수용을 통해 한국인의 미감과 정서를 표현한 "바보산수"
는 호방한 필치와 화려한 색채, 해학적인 표현으로 그림 문외한들에게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다.
운보는 또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장애자들의 복지 증진에
앞장섰다.
한국농아복지회장을 맡아 농아복지회관을 짓고 재활훈련원을 운영했으며
장애자를 위한 일이라면 아무리 비싼 작품도 서슴치 않고 내놨다.
유명세인가, 작품의 인기 탓인가.
그림도난 사건만 나면 오르내리더니 이번엔 다시 신동아그룹 최순영회장이
구속 직전 그의 그림 60억원어치를 샀다고 해서 난리다.
투자차 혹은 미술관 준비용이라는 신동아측 주장과 달리 로비용이라는 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수사가 진행중이다.
따뜻한 마음의 위대한 예술가 운보는 지금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먼저간
아내 우향을 만날 채비를 하고 있다.
내용이야 어떻든 욕심으로 얼룩진 사람들때문에 노대가의 마지막 가는 길이
어지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