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미 애리조나대학의 고든 튤럭(Gordon Tullock) 교수를 맞아 몇몇
민간단체와 기관 공동주최로 우리의 부패문제에 관한 토론회가 열린 적이
있다.

특히 관심을 끈 내용은 부패의 원인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이었다.

튤럭 교수는 부패를 일종의 지대추구(rent seeking)행위로 규정하고 시종
학문적으로 풀어나가려 들었다.

이에반해 국내 참가자들은 우리 사회의 현실적 원인규명에 주력해서
정경유착, 구체적으로는 재벌과 권력, 사업자와 관청간의 결탁에 그 책임을
돌리는 쪽과 그에대한 반박논리로 갈리는 모습이었다.

"조선왕조때도 재벌이 있었더냐" "일선조직과 사회 구석구석 안썩은 데가
드문 총체적 부패는 어떻게 설명해야 옳으냐"는 반박에는 정경유착 논리도
설땅이 궁해보였다.

"씨랜드 어린이 참사사건"의 배후에도 아니나 다를까 얽히고설킨 부패사슬이
도사리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인허가 관청과 사업자 사이뿐이 아니다.

시설이용자와 사업주간에도 관행적으로 검은 거래가 있었다지 않은가.

한국인은 반성은 빠른데 실천이 느리다고 어느 외국인이 꼬집었다고 한다.

한가지 덧붙여야 할 게 있다.

빨리 잊는다.

실천이 더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되는 건 그 때문이다.

온통 야단법석을 떨다가도 얼마안가 까맣게 잊는다.

이번 사건도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냄비기질은 부정부패 사건이나 사고 뒤처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부패문제의 심각성은 그 보편현상에 있다.

청렴강직이 예외현상으로 대서특필되는 건 바로 우리 사회가 부정과 부패에
짙게 변색돼 있다는 증거다.

뿐만 아니라 세월이 가면서 나아지기는 커녕 더욱 중증이 돼가고 있다.

각 나라 부패 정도를 비교 평가하는 기준으로 인용되곤 하는 국제투명성
협회의 청렴도지수 순위에서 우리는 조사대상 85개국중 96년 27위, 97년
34위, 98년 43위로 갈수록 처지고 있다.

그래도 중간은 되지 않느냐고 항변하면 할말이 없지만 그사이 수없이
반복돼온 개혁과 사정소동이 무색해진다.

현실이 이러니 외국인들이 투자하고 싶어질리 만무하다.

기껏해야 투기자금으로 단기차익이나 노리기 일쑤다.

증시가 뜨거워질 수밖에.

정작 심각한 문제는 부패불감증이다.

뇌물과 검은거래에 죄의식은 고사하고 항용 있는, 없어서는 되레 불편한
관행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풍조와 사람들의 의식이 문제다.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금융부실의 배경으로 지난해에
크게 논란된 바 있지만 부정부패에 이르러서는 해이정도를 넘어 완전 붕괴
되었다고 해야 할 지경이다.

뇌물을 받아도 대가성이 있다 없다로 유무죄를 가리고 얼마까지는 떡값
이니까 주고받아도 괜찮다는 식의 황당한 기준이 아무렇지 않게 통한다.

공직자 재산등록은 있으나마나이고 부패방지법이 과연 제정되기나 할건지
국회는 입을 봉하고 있다.

옷로비 의혹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진 이른바 공직자 10계명이란 것도 그렇다.

실효성 자체가 의문시 되지만 축.조의금 수령금지 공직자 직급을 1급이상
으로 올려도 문제가 남기는 매한가지다.

그 수효가 적으니까 목소리가 낮아질 뿐이다.

어떻게 하면 이 불감증을 고칠 수 있을까.

먼저 부패의 실상과 현실에 대한 부끄럽지만 숨김없는 이해와 반성이
중요하다.

어느 한 계층이나 부류 또는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의 총체적
부패가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맑은 물엔 고기가 못산다"는, 말도 안되는 자기합리화 속담 대신 "맑은
물이라야 고기가 산다"는 말로 인식과 분위기가 혁신돼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제도와 교육 두갈래로 부패를 줄여가야 한다.

시간이 걸려도 교육이 가장 확실하고 바람직한 방법이지만 제도를 통해
이를 촉진하고 담보할 필요가 있다.

부패방지법의 조속한 제정은 중요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이를통해 우선 국가의 확고한 의지를 천명하고 지도층이 솔선하는 길을
터야 한다.

고위공직자 정치인 실업인 고소득자 등 사회지도층과 부유층이 먼저 부정과
비리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않고는 부패는 근절은커녕 영영 줄지 않을 것이다.

지도층이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교육도 소용이 없다.

교육하면 비단 학교교육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교육이 못지 않게 중요하다.

어찌보면 더욱 중요하다.

아무튼 세가지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 현실은 조화는 고사하고 어느것 하나 제대로 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형편이 못된다.

가정 학교 사회 할것 없이 자라는 세대가 배울게 없다는 자조와 탄식이
끊이지 않는 현실이다.

경제가 빠른 회복을 보이고 주가가 1,000포인트를 넘어섰다고 들떠있지만
어떻게든 부패수렁을 벗어나 투명하고 건강한 사회가 되지 못하면 언제
또다시 IMF위기에 빠질지 모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