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 서강대 교수 / 경제학 >

플라톤이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시라큐스의 폭정 아래 종사하면서 철인군주
를 이상적 통치자로 꿈꿨던 까닭은 무엇인가.

동서고금을 통해 혼자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재판하는 절대권한을 거머쥔
국왕들은 대부분 국리민복은 소홀히 하는 전제군주였다.

수많은 역사적 경험사례를 토대로 입법.행정.사법을 분리하자는 몽테스키외
의 삼권분립론이 나왔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상의 나라들 가운데 국가권력이 세 권부로 잘 균형잡힌
예는 흔지 않고 거의 대부분 행정부가 입법과 사법을 압도하는 모습이다.

한국도 행정 우위국이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일 뿐 아니라 다른 두 권부를 압도하는 권좌이다.

앞서 말한대로 시라큐스 지방에는 디오니시우스 왕이 자기를 부러워하는
데모클리스를 머리털에 매달린 칼 밑에 앉혀 왕위의 위협을 깨우쳤다는
전설적 얘기가 있다.

요즘 서울의 공동정권 머리위에 내각제 개헌론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내각제 개헌이 왜 필요한가.

개헌론을 주장하는 자민련측 입장은 "청와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언급한 JP의 말로 압축 표현되는 듯하다.

일단 최고 권좌에 오르면 자칫 탐닉하기 쉬운 독선적 국정운영 경향을
억제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내각책임제가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그것이 지난번 대선 때 대국민 공약사항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개헌론의 국민공약 주장은 논거도 취약하다.

그것은 DJ와 JP 두 사람간의 약속이었지 국민은 들러리였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지지기반은 두 당수의 출신지역이었고 대부분의
지지자들은 두 사람을 보고 찍었지 개헌공약을 믿고 투표하진 않았다.

내각제 공약은 두 노련한 정치인을 한데 묶는 명분을 제공하는 편의주의
수단이었다.

정치인의 약속이란 깨지기 쉬운 접시임을 보여주는 수많은 경험사례가
있었고, 두 당사자들도 그러한 사례의 주인공이었다.

대통령의 독주를 제어하는 장치로서의 내각제 개헌주장은 상대적으로 유효한
논거가 된다.

내각책임제가 되면 현행 체제하에서처럼 대통령에 집중된 권한이 상당부분
총리에게 이양돼 독선적인 국정운영 경향에 제동이 걸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국정의 안정성과 일관성은 손상될 것이다.

정당이 이념정당이 아니고, 한 지붕 아래 이질적인 요소들이 총 보스와
중간보스 등 인맥중심으로 몰려 집단서식하는 행태의 정당을 가진 나라에선
정국 불안정은 심각하다.

제1공화국을 마감시킨 1960년 학생민주의거 직후 개헌이 바로 내각책임제
개헌 아니었던가.

39년전 내각책임제를 도입한 개헌이후 짧은 제2공화국 집권동안 국정의
불안정, 사회혼란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충분한 실험기간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것은 군사정변의
좋은 빌미가 됐다.

민정이양과 동시에 다시 대통령책임제로 개헌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는 측, 특히 JP는 지난 60년대 초엔 왜 대통령제
개헌이 필요했고 2000년대 초엔 왜 다시 내각제 개헌이 필요한가를 분명히
설명할 논리가 있어야 한다.

국민회의 측에서도 왜 대선때 했던 개헌공약을 망설이는지 논거를 밝혀야
한다.

다시 1961년을 되돌아 보면 군사정권의 역점과제중 하나는 대기업의 부정
축재 처리문제, 특히 정치권력과 정경유착 단절문제였다.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제3공화국도 더욱 깊은 정경유착의 늪에 빠지게
되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개혁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그런데 60년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덩치와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란 기업집단
들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

재벌다운 재벌이 등장한 것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정치판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선거구 관리의 일상적 경비지출만을 위해서도 국회의원 세비를 몽땅 털어도
부족하다.

법 규정 한도내에서 선거자금을 쓰고 당선된 국회의원들을 헤아리는 데
다섯 손가락 모두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법을 어기고 당선된다.

말하자면 불법자여야 입법자가 되는 판국이다.

결과적으로 사직당국의 천국이 된다.

털어 먼지 안나는 사람 없듯이, 캐어서 비자금 구린내 안나는 정치인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직당국의 인사권한을 장악한 대통령은 입법부마저 장악한다.

내각책임제 도입을 가장 갈망하는 측은 재벌일 것이다.

정치인 소속정당의 공식명칭이 무엇이든 국회와 내각의 구성은 사실상
자금지원을 하는 재벌의 세력분포에 따라 판가름 난다.

요즘 재벌의 제2금융권 지배가 문제되고 있지만 내각책임제가 되면 재벌의
정치권 지배의 길이 열리게 될 공산이 크다.

당사자들의 속셈은 다르겠지만 국민은 "3김시대"의 종식을 바라고 있다.

내각책임제 개헌은 국민이 식상한 3김시대를 연장하는 술수로 보인다.

진정으로 정치 원로다운 도량과 품격있는 정치의 모습을 보고 싶다.

사람은 늙으면서 욕심을 버려야 한다.

노욕없는 정치가라야 국민의 존경을 살 수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