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분 < 방송 작가 >

어리둥절함 투성이었다.

3년전 골프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내가 아는 용어라고는 "홀인원" 정도가
고작.

홀인원도 파4홀이건 파5홀이건 아무데서나 터지는 것으로 알았으니...

그래도 직업이 방송작가이니 "아는척"하며 대본은 써야했다.

그러나 언제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골프깨나 안다는 MC는 머리 쥐어짜며 밤새 쓴 대본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골프치기 좋은 날씨입니다"라고 지극히 정상적 멘트를 써놓으면 "날씨와
스코어가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바꿔 버린다.

지금 생각하면 "날씨 탓하면 안된다"는 뜻이었겠지만 당시엔 "분노"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골퍼들도 이상했다.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방송출연인데 "싫다"는 사람이 많았다.

"시합이 있고, 말재주가 없고" 등등 이유도 다양했다.

그들과 반대되게 "수상한 건" 연예인들.

다른 프로그램에선 그렇게 나와달라해도 스케줄 운운하며 튕기던 연예인들이
명프로의 레슨을 핑계로 섭외하면 십중팔구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 골프를 안지 3년.

난 그 어리둥절한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골퍼라는 사람들은 박세리의 4승보다 자신의 버디4개가 훨씬 더 기쁘고
소중하다는 것.

프로들의 컨디션 조절은 정말 섬세해야 한다는 것.

제아무리 바빠도 "골프치러 가자"면 단번에 그 빡빡한 스케줄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점등이다.

하물며 병아리골퍼인 나도 라운드 전날엔 다른 약속을 다 뿌리치는데
프로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어느 유명프로의 가족들은 시합 전날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워 까치발로
걸어다닌다고 하니.

골프는 골프 이외의 모든걸 시시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등산광 낚시광이 골프입문후엔 산과 물이 모두 페어웨이로 변한다더니
나도 마찬가지였다.

전엔 온국민의 눈물을 쏙 뺄 다큐멘터리를 터뜨리는게 욕심이었는데 요즘엔
다른 프로그램 제의를 모두 거절한다.

"저 골프 프로그램만으로도 족하거든요"하고.

내가 오버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가.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