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디를 가나 신창원에 관한 이야기가 분분하다.

대개는 흥미거리로, 또는 동정적으로 이야기된다.

사람들이 신창원에 대해 동정적인 것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성을 반영한다.

신창원보다 더한 도둑이 우글거리는 사회에서 신창원은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언론의 사설과 칼럼들은 신창원과 관련해 사회 병리를 진단하고 개탄하는
논조 일색이었다.

신창원의 대담한 범죄와 도피행각이 대중매체의 집중조명을 받으면서 제2,
제3의 신창원을 꿈꾸는 예비생들이 생겨날 위험성이 크다.

실제로 우리는 이 시간에도 우리 사회에서 또 다른 신창원이 크고 있을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살인강도 행위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복역중 탈옥했던 신창원은 선천적으로
범죄성을 타고난 것이라기 보다, 그를 그렇게 만들어간 후천적 환경의 탓이
크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읜 결손가정의 아동으로서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다.

손버릇이 나쁘다는 이유로 15살때 처음 들어간 소년원에서 그는 감화를
받기보다 범죄기술을 습득했을 뿐이다.

오늘도 우리 사회에는 수만명의 상처받은 아이들이 결손가정에서 또는 보호
시설 안에서 사랑의 결핍과 함께 크고 있다.

한국사회는 상대적으로 냉정하다.

반면에 가족이기주의는 도를 지나칠 만큼 충만하다.

서구사회는 개인주의가 발달했지만,절반 이상의 국민이 공적인 봉사활동에
참여한 경험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5%미만이다.

내가 잘 아는 주한 영국대사관 공보관 박영숙씨는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는 수양부모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그 반응은 미약하다.

선진국에서는 보육원과 고아원 등 아동시설이 사라진 지 오래다.

미혼모 자녀나 결손가정 아동들은 모두가 일반 가정에 영입돼 보통 아이들과
함께 자라난다.

내 스스로도 내 아이들에게 기울이는 사랑의 1백분의 1이나마 사랑이 결핍한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있는지, 스스로 묻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