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의 영고성쇠는 마치 사람의 일생과도 같다.

한때는 서울의 "명동"처럼 최고의 번화가였다가 새동네에 밀려 시들어가기도
하고 "난지도"처럼 쓰레기더미에 묻혔다가 되살아 나기도 한다.

"판문점"처럼 갑자기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가 하면 망우리처럼 망자의
고장이 되기도 한다.

지명에는 뜻이 있고 지형 역사 풍속등 유래가 있게 마련이지만 끝내는
그 땅과는 아랑곳없는 다른 이름으로 뒤바뀐 경우가 많다.

서울 동명의 경우 한양천도때의 52방중 6백여년 동안 이름을 그대로 유지해
오고 있는 동은 태평 적선 가회 안국 순화를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인간의 보편적 바람을 뜻하는 평범한 지명들이 오래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일까.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본래 이름은 "수진방"이다.

조선개국 일등공신 정도전은 오래 장수할 곳이라고 생각해 "수진방"이라
이름짓고 그 터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가 역적으로 몰려 이곳에서 피살되자 "정도전의 수가 다 한곳"
이라는 뜻의 수진방으로 불렸다가 일제때 송현동과 합쳐져 수송동으로
바뀌었다.

서울 강남구의 압구정동은 재물과 권세에 탐닉했던 세조때의 권신 한명회
의 아호를 따다 지은 정자터가 있던 곳이다.

당시 선비들은 갈매기와 친하다는 뜻의 "친할 압"자를 "누를 압"자로
바꾸어 압구정이라 불렀다.

오늘날의 압구정동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 것인가.

올 연말까지 끝내기로 한 "새주소부여사업"에 따라 서울시가 소로 이름짓기
마무리 작업에 나선 모양이다.

그중에 김종필 국무총리의 자택앞 소로의 이름을 총리의 아호를 따
"운정로"로 하자는 제안이 나와 화제가 되고 있다.

현직 총리의 아호를 붙이는 것도 무리지만 역사성이나 의미에 지나치게
집착할 것이 아니라 길 이름도 인명처럼 부르기 쉽고 쓰기쉽고 듣기좋고
읽기쉬운 평범한 것으로 지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태평로나 적선동처럼 생명력이 길것 같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