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4월말.

박상은 대한제당 사장은 노조위원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후에 찾아뵙겠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박 사장은 임금협상 시기를 목전에 두고 노조위원장(당시 손종흥씨)이 왜
갑작스럽게 방문하겠다는 것인 지 궁금했다.

다소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사장실에 들어온 노조위원장은 뜻밖의 선언을 했다.

"국내외 경제상황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올해 임금 및 단체협상을 회사에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지난 69년 노조가 설립된이후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난뒤 박 사장의 얼굴은 환하게 피었다.

위원장의 손을 꽉 잡고 감사의 뜻을 밝혔다.

어렵지만 근로자들의 뜻이 최대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화답했다.

며칠 뒤인 5월7일 대한제당 임직원은 "경쟁력 강화및 노사화합 결의대회"를
갖고 위기 공동대응을 다짐했다.

물론 외환위기가 대한제당을 비켜가지는 않았다.

97년에 29억원의 적자를 냈다.

15년만의 치욕적인 기록이었다.

전체 차입금의 45%가 달러화 부채인 상황에서 원화의 환율이 두배로 뛰어
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제당은 이 위기를 남들과는 다르게 넘겼다.

회사마다 감원바람이 불었지만 단 1명의 사원도 내보내지 않았다.

임금도 깎지 않았다.

"동결"로 끝냈다.

관리직 사원들만 임금의 5%를 자진반납했다.

여기에는 "먼저 종업원의 생활이 안정돼야 회사가 잘 돌아가는 만큼 당장
어렵다고 월급을 미루거나 주지 않는 것은 절대 안된다"는 창업주(고 설경동
회장)의 유지가 크게 작용했다.

"위기상황에서도 감원 임금삭감 노사갈등이 없다"는 대한제당의 "3무경영"
신화가 지켜질 수 있었다.

대신에 회사측은 부동산과 주식, 계열사 등을 팔아 1백1억원을 조달해 빚을
갚았다.

97년말 3백70%에 달했던 부채비율이 지난 6월 1백85%로 떨어졌다.

노사가 땀을 흘린 결과 작년에 60억원의 흑자로 돌아섰다.

올 상반기에는 설탕과 사료가 잘 팔려 63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이런 상황은 곧바로 근로자 복지로 돌아가고 있다.

회사와 노조(위원장 백동선)는 지난 5월 금년도 기본급을 6.8% 올리고
울산공장에 복지회관을 신축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노조는 광주공장 근로자들을 위해 기존 임대아파트 3채 외에 2채를
더 확보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구는 단체협약 대상도 아니어서 노조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회사측은 선선히 받아들였다.

지난 56년 창업이후 단 1건의 파업도 일으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위기 때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준 근로자들에 대한 애정의 표시였다.

대한제당은 최근 과학기술부가 주관한 국가지정연구실사업 연구프로젝트에서
20대 1의 경쟁을 뚫고 사업선정권을 따내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남은 음식물을 이용한 사료화공장 건설" 계획이 그것이다.

대한제당 노사의 "3무경영"은 앞으로 생명공학 등에 진출해 초일류
종합식품소재회사로 발돋움한다는 전략에 믿거름이 될 것이다.

< 인천=최승욱 기자 swchoi@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