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문화재의 발굴과 복원이 유행처럼 휩쓴 시기가 있었다.

쉴새없이 유적을 파헤치고 성곽이나 고건물의 복원에 열을 올렸다.

60,70년대의 일이다.

지금 그 결과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해도 그로인한 유적파괴나

대표적인 것이 문루를 목재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짓고 단청을 입힌
서울의 광화문과 석연치 않은 신라의 건물 3동을 지어 새 공원으로 단장한
경국의 안압지다.

인도 그리스 이집트의 문화유적지를 돌아보면 복원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무너졌으면 무너진 대로 돌덩어리를 그대로 쌓아 놓았다.

그대신 더이상 훼손되지 않게 노력을 기울이고 유실되지 않도록 돌덩어리에
번호까지 매겨 놓았다.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복원을 좋아한다.

지금은 없었던 일이 돼버렸지만 지난95년 서울시는 광화문광장곁에 조선의
6조 관아와 행랑을 복원한다는 황당한 계획을 내놓았다.

불교계는 얼마전까지만해도 황룡사9층탑과 감은사를 복원하겠다고 나섰다.

정책입안자나 사회지도층인사들이 문화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복원병에
걸려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한다.

조선총독부건물철거터에 복원돼 모습을 드러낸 경복궁 흥례문의 들보와
기둥으로 미국산 수입 소나무가 쓰였는가 하면 처마가 원형보다 높게
시공되는등 원형과는 다른 부문이 많다는 감사원 특감결과가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

아무리 토종 소나무 목재가 구하기 어렵다 해도 일제의 잔재를 없애고
그 위에 복원하는 건물에 문화재청이 미국산 소나무를 쓰게한 것은 문화재의
의미조차 모르는 처사다.

또 1927년에 헐려 사진과 평면도까지 남아 원형추정이 가능한 건물의 원형이
감사에서 지적될 정도로 달라졌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문화재 복원을 이처럼 안이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모든 복원은 실패하게 마련이고 복원되는 것이 있다면 전통의 광신적인
왜곡일 뿐"이라는 전통에 대한 이론가 에드워드 쉴즈의 경고를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