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소나무 아래서 태어나 소나무와 더불어 살다가 소나무 그늘에서
죽는다는 말이 있다.

전국 산야에 널리 분포돼 있는 소나무는 그만큼 우리생활에 물질적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다.

소나무는 집을 짓고 선박이나 가구를 만드는 주요자재였다.

또 왕실의 고급 관재로 쓰이기도 했다.

경북 봉화지방에서 자란 춘양목은 황적색을 띠어 황장목이라고도 불렀는데
최고급 소나무 목재로 첬다.

한마디로 한국은 "소나무 문화"의 나라다.

소나무의 중요성은 조선조 육송정책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도성내 북악산 인왕산 세검정뒷산은 금산이라해서 출입을 막았다.

그리고 매년 여름이면 수천명씩을 동원해 송충을 잡았다.

1411년에는 3천명을 동원해 20일동안 남산에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도
있다.

개인이 소나무 1천2그루를 심으면 포상하는 제도도 있었다.

조선후기까지 국가가 궁궐을 짓거나 군용선을 건조하는데 필요한 목재를
충당하기 위해 지정관리한 봉산과 송전이 각각 2백82개처, 2백29개처에
달했다.

고급재인 황장목만 기르는 봉산도 60개처나 됐다.

지방에서는 송계를 조직해 자체적으로 송림의 황폐를 막아 공급에 부족함이
없었다.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2백70년만에 복원할 때 소요된 목재를
공급한 곳도 전국의 봉산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왕실의 능이나 원의 소나무까지 베어다 썼다.

"조선팔도 좋다는 나무 경복궁 짓느라고 다 들어 간다"는 "경복궁타령"의
사설은 당시 사정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문화재인 경복궁을 보수 복원하면서 토종 소나무 대재목을
구하기 어려워 미국산 소나무를 쓴 것이 뒤늦게 알려져 말썽이다.

전국의 산림이 그만큼 황폐화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나무 소재목은 30~40년 대재목은 60~80년의 시간이 걸린다.

지금부터라도 문화재 보수 복원을 위한 "문화재청 송림"이라도 지정해
미국 일본의 소나무보다 단단하다는 토종 소나무를 길러야 할 판국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