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이론의 하나로 "사다리론"이라는게 있다.

우리의 머리속엔 여러 개의 "인식 사다리"가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사다리는 서로 다른 상품군을 의미한다.

각 사다리의 한칸 한칸은 구체적인 브랜드의 상품이다.

예를들어 자동차 TV 비누 치약 담배라는 사다리가, 또 자동차 사다리에는
그랜저 소나타 체어맨 레간자 등 수많은 칸이 있을수 있다.

사람들은 물건을 살때 이 사다리 맨 꼭대기에 위치한 브랜드를 먼저 찾는다.

가장 좋은 제품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케팅 전문가 알 리스와 잭 트라우트는 "포지셔닝"(Positioning)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면서 이 사다리 이론을 창안해냈다.

이 이론은 한번 정해진 사다리칸의 위치는 여간해선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단 각 상품(브랜드)의 사다리상 위치가 정해지면 아무리 좋은 제품이
나와도 사람들은 사다리 맨위에 위치한 상품을 사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사다리론은 사람의 사고가 워낙 완고해서 이미 짜여진 구조, 즉 기존의
믿음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사실이 어떻든 "믿고 싶은대로" 믿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의 속성은 종종 진실과 괴리를 보인다.

값싸고 질좋은 상품이 눈앞에 있는데도 "브랜드"제품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기를 꺼리는 것이다.

잘못된 믿음으로 인한 손해는 고스란히 소비자 자신의 몫이다.

"믿고 싶은대로 믿는다"는 사다리론은 "기업관"에도 적용된다.

기업에 관한 대중들의 머리속 기억 사다리는 "대기업(재벌)은 나쁘다"는
인식이 맨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다.

일부 기업의 편법적 행태, 공평보다는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
정치권의 기업 때리기 등 다양한 원인이 이런 인식구조를 만들었다.

반면 같은 기업이라도 중소기업은 선한 존재로 여긴다.

이같은 믿음은 진실이야 어떻든 여간해선 바뀌어지지 않고있다.

그러나 "대기업은 나쁘고 중소기업은 좋다"는 믿음이 과연 제대로된 것일까.

냉정히 따져보면 이처럼 순진한 생각도 없을 것이다.

사람이 저마다 각각인 것처럼 기업도 그 규모에 관계없이 각각이라는건
상식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대립적"이긴 하지만 한쪽이 완전히 없어져야만 하는
"적대적" 관계는 아니다.

오히려 서로 의존하는 보완적 관계다.

기업에 대한 우리의 사고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둘
사이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완고한 기억 사다리는 이를 믿음의 차원으로 격상시킨다.

"적대적 관계"와 "대립적 관계"는 중국의 마오쩌뚱(모택동)이 그의 저서
"모순론"에서 잘 설명해놓고 있다.

그는 모순의 종류를 고대 로마의 절대군주와 노예처럼 한쪽이 한쪽을 제거
하지 않고서는 생존할수 없는 적대적 관계와, 밝음(양)과 어둠(음)처럼 서로
반대되는듯 하면서도 사실은 상대방에 자신의 존재 근거를 갖고있는 대립적
관계로 나누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관계는 사실은 서로 의지하는 대립적 관계다.

상품에 대한 기억 사다리가 개인적 손실을 초래하는데 비해 "대기업은
나쁘다"는 잘못된 믿음은 사회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요구한다.

이같은 믿음은 우선 일할 의욕을 감소시켜 사회전체적 "파이"의 크기를
증대시키지 못한다.

분위기가 이럴진대 사회 구성원들이 최선을 다해 회사에 "충성"할리는
만무하다.

회사의 생산성은 떨어지고 경쟁력이 약화됨은 물론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경영인들이 잘못된 사회적 인식을 없애기 위해 본연의
경영활동보다는 경영외적인 사항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기업인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경영활동 견제조치에 일일이
대응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돈이 비생산적으로 사용된다.

이는 곧 사회적 비용이 된다.

특히 후진국에서 이런 현상은 많이 나타난다.

미국의 경우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존경받고 선망의 대상이다.

클린턴 대통령도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기업 CEO들이라고 거리낌없이
말한다.

클린턴은 실제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을 비롯한 많은 CEO들로부터
조언을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한다고 한다.

이에비해 한국에선 아직 대기업 최고 경영자들은 경원시되고 있다.

최근들어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존경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다.

CEO에 대한 대우도 미국과 견줘 한참이나 뒤떨어진다.

글로벌 스탠더드가 강조되는 요즘, 대기업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대기업"가치를 기억 사다리의 상층부로 올리는 것, 그것이 사회적 비용을
줄이면서 파이는 더 크게하는 길의 하나다.

< phi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