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98년 2월초.

한화의 허한 노조위원장과 몇몇 노조간부들이 서울 을지로 한화빌딩 24층
사무실로 이순종 사장을 찾아왔다.

구조조정과 인력감축이 이슈였던 때라 노조간부들의 방문은 회사를
긴장시켰다.

이 사장과 마주 앉은 허 위원장 등 노조지도부는 당초 우려를 깨고 임금동결
과 상여금반납을 선언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회사가 곧 부도날 것처럼 소문이 떠돌아 전 직원이 위기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노조의 결심은 회사에 활력을 불어넣는 기폭제가 됐다.

노조는 한발 더 나아가 "생산성 향상 결의대회"를 열고 결의문도 채택했다.

위기극복을 위한 의지와 자발적인 고통분담,최고경영자에 대한 신뢰와 격려
등을 담은 장문의 글을 경영진에게 보냈다.

노조가 이렇게 나오자 회사측도 화답했다.

경영상태를 소상히 밝히기로 한 것.

모든 장부를 공개했다.

사장이 현장을 방문, 근로자들과 수시로 만났다.

질의 응답을 통해 모든 궁금증을 풀어줬다.

자연스럽게 노사간 화합과 신뢰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작년 여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매년 여름휴가철 마다 회사가 직원들을 위해 휴양소를 설치해주어 왔는데
작년엔 노조가 자진해서 이를 말렸다.

경영지표가 공개되면서 회사의 어려움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측은 노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려울 때 일수록 쉬어야
한다"며 4천여만원을 들여 대천해수욕장에 휴양소를 만들었다.

지난해 회사 주가가 곤두박질칠 때는 노조원들이 주머니를 털어 우리사주
갖기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2천~3천원대에 산 주식이 1천원대로 떨어져 종업원들은 손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주가가 급등,대부분의 종업원들이 2~3배씩의
이익을 봤다.

한화 노조가 이렇게 회사에 신뢰를 갖게 된 것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회사가
보여준 노력이 큰 몫을 했다.

지난해 경제위기 속에서 전 직원의 25% 가량인 7백여명을 내보야했다.

그러나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나가게한 경우는 단 한건도 없었다.

관리직 사원에 대해선 명퇴신청을 받았다.

생산직의 경우 자연퇴사로 생긴 결원을 채우지 않는 식으로 버텼다.

특히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으로 특정 사업이 다른 업체에 넘어갈 때는
인력승계를 최우선 계약조건으로 내걸었다.

매각대금을 적게 받더라도 사원의 신분은 1백% 보장해줘야 한다는 김승연
회장의 "신뢰와 의리 경영"이 밑바탕이 됐다.

이같은 노사간 협력 분위기의 저변에는 한화 특유의 "다이나마이트(화약)
문화"가 깔려있기도 하다.

위험물인 화약을 만들면서 "목숨을 걸고" 일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립
보다 화합의 문화가 싹튼다는 것.

노사화합 노력은 곧바로 경영실적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도 5년만에 "흑자전환"의 기록을 세웠다.

협조융자를 받은 국내 11개 기업중 유일하게 융자금액을 전액 상환하기도
했다.

올들어서도 성과는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상반기에 매출 1천3백94억원, 경상이익 99억원을 기록했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올 연간으로는 3천9백92억원의 매출과 4백52억원의
경상이익, 4백10억원의 당기 순이익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회사측은 기대
하고 있다.

< 인천=이건호 기자 leek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