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장성의 사카키바라 전 재무관이 퇴임하고 나서 어느 잡지에 재직시의
여러 비화와 소회를 털어놓았는데 매우 흥미롭고 시사적인 대목이 많다.

사카키바라는 4년여 동안 일본 대장성의 국제금융국장과 재무관으로 있으면
서 대외통화교섭을 담당했기 때문에 국제금융의 표리에 매우 정통한 인물이다

"미스터 엔"이란 별명을 가진 사카키바라의 술회를 들으면 선진강대국들은
치열한 전략게임을 하고 있다.

반면 한국 등은 바깥 동향에 매우 무지.무관심하며 따라서 한국과 같은
약소국들은 그들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97년 통화 파동으로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이 차례로 IMF 관리체제에 들어
가자 미국은 아시아의 연고적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를 고칠 좋은
찬스라 보고 구조개혁에 강한 열의와 집념을 보였다고 한다.

물론 아시아를 미국식 자본주의로 바꾸는 것, 아시아 금융시장에 미국
자본의 진출을 쉽게 한다는 것 등의 국가전략이 깔려 있었다.

97년11월 한국의 외환위기 때 미국이 일본의 지원을 막고 IMF 지원으로
일원화시킨 것이나 IMF협상 때 그렇게 강경한 자세를 보인 이유를 이제는
알 만하다.

사카키바라는 아시아 통화위기가 아시아의 경제구조 때문만이 아니라 글로벌
경제(Global Economy)의 문제점이라 보고 이 점을 역설했지만 미국은 아시아
경제구조론을 고집했다고 한다.

아시아 통화위기는 국제단기자본의 급격한 이동에도 큰 원인이 있었다.

98년 들어서도 국제통화불안은 계속돼 8월에 러시아가 사실상의 모라토리엄
을 선언하고 그 여파가 브라질 등 남미로 번졌다.

미국 증시도 꿈의 헤지펀드라 불리는 LTCM이 파산 직전에 가는 등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다.

사실 98년 가을께 미.일 수뇌부가 세계공황의 재래를 심각하게 걱정했다고
한다.

그해 9월 중순 사카키바라는 서머스 당시 미 재무부 차관과 비밀회담을
가졌는데 이때 두 사람은 아시아의 구조개혁만으론 세계 경제위기가 해소되지
않으며 미국과 일본 등이 주도가 돼 획기적 지원책을 세워야 할 필요성에
의견의 접근을 본다.

한국과 같은 위기국을 야단만 칠 게 아니라 스스로 설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는데 동의한 것이다.

그 즈음해서 미국의 정책기조가 변하고 한국에 대한 태도도 바뀐다.

사실 미국의 가혹한 압박으로 한국 등 아시아가 빈사 지경에 빠지고 그
여파가 러시아 브라질에 번지자 미국과 IMF 정책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IMF 지원의 성공신화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 때문에 고환율, 고금리도 완화되고 재정정책에도 숨통을 터준다.

또 일본이 미야자와 플랜 아래 한국 등 아시아를 직접 돕도록 양해한다.

11월엔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한국에 와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의 적극지원을 약속한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신용등급은 올라가고 관망세를 보이던 외국자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주가도 올라가고 한국 외채의 이자도 현저히 떨어진다.

이때부터 한국은 경제회복의 급궤도를 타게 되는 것이다.

사카키바라는 일본의 위험을 예상했으면서도 빨리 금융개혁을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금융개혁 지연은 일본이 결단을 못내렸기 때문인데 그 이유 중의 하나를
일본 매스컴과 경제학자들의 지나친 사명감과 국제감각의 결여에서 찾고
있다.

즉 은행을 개혁하려면 막대한 공적자금 투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학자들은 국민의 세금을 아직 망하지도 않은 은행의 회생을 위해
써서는 안되며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정론을 펴는 바람에 개혁시기를 놓쳤
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미국이 말하는 것을 무조건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라
하여 따라가도록 주장함으로서 일본의 정책 선택의 폭을 좁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전략과 이익을 도왔다는 것이다.

사카키바라는 이 세상 모든 일은 양면성을 갖고 있으므로 상황에 따라
전략적 정책 판단을 해야 하며 명분적 원칙론을 고집하면 더 큰 피해가 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카키바라의 술회는 한국의 경제 구조가 천하에 나쁜 것이어서 꼭 그
때문에 IMF 위기가 온 것으로 자괴감에 차있는 한국에 대해 그나마 한줄기
위안을 준다.

또 글로벌 경제를 외치면서도 바깥 정세에 너무 무관심하고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지고지선의 가치라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