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현의 미국 LPGA 투어 등정은 온가족이 함께한 "인고의 결실"이었다.

경비가 부족했던 김미현은 대회 출전상금으로 다음 대회 출전경비를 조달
해야 했다.

경기를 마치기 무섭게 지친 몸을 중고 밴에 던졌고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낮설은 코스를 찾아 이곳저곳을 물어 물어 돌아 다녀야 했다.

김미현의 스테이트팜레일 클래식 우승은 그같은 "인고의 여정" 끝에 얻은
첫 과실인 셈이다.

98 한국여자프로골프 상금왕인 김이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떠난 것은
LPGA 투어 최종테스트를 통과한지 약 1개월 뒤인 지난해 11월말.

김의 부친 김정길씨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투어생활의 이동수단으로 중고
밴을 마련했다.

스폰서가 없는 상태에서 딸이 국내에서 모아둔 상금과 약간의 "종자돈"
으로는 다른 선수들처럼 비행기로 대회장소를 옮겨다니고 특급호텔에 머물
형편이 못됐기 때문.

김은 올초 헬스사우스이너규럴대회로 데뷔전을 치르면서 고난의 투어생활
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끄는 밴을 타고 대회장을 옮겨다니면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겨웠다.

낯선 곳에서 이방인들을 만나는 것도 언어문제와 함께 큰 부담이었다.

김은 생각보다 고달픈 투어 생활로 2월의 3개대회 연속 커트탈락 등
쓰라림을 맛보기도 했다.

거기에 신경성위염까지 겹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었다.

김은 이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오기가 발동했다.

재기를 다짐하며 심신을 추스렸다.

4월 칙필A채리티선수권대회에서 공동 9위로 생애 첫 "톱10"을 달성하면서
자신감을 회복했다.

지난 7월 한별텔레콤과의 스폰서계약은 김의 LPGA 투어 생활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스폰서계약 이후 첫 출전한 JAL 빅애플에서 1라운드 4언더파로 순조롭게
출발했다.

하지만 바이러스성 독감으로 중도포기해 아쉬움을 남겼다.

김은 이후 본격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뒤모리에클래식에서 공동 6위를 차지, 세계
골프계의 시선을 끌었다.

이후 퍼스타클래식 공동 4위, 올스모빌클래식 단독 10위에 이어 마침내
스테이트팜레일클래식에서 우승컵을 안았다.

김이 처음으로 골프채를 잡은 것은 부산의 충무초등학교 6년때인 지난
88년.

개인사업을 하던 큰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초등학교 6년생으로는 표준 이상인 키 150cm였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았지만 골프실력 만큼은
동료 선수들을 압도했다.

키가 작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선수들보다 더 노력하게 됐다.

국내무대에서 정상에 오르자 세계제패의 각오까지 키웠다.

김은 부산진여고 졸업과 함께 인천으로 이사하면서 용인대로 진학했다.

하지만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기 힘들다고 판단, 대학 2년때인 96년 학업을
포기했다.

그는 박세리와 나란히 같은해 6월 프로에 입문, 3승을 거두며 상금순위
2위를 차지했다.

97~98년에도 역시 3승씩 기록하며 국내 상금왕 2연패를 이룩했다.

< 유재혁 기자 yooj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