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머노믹스] (여성 파이어니어) 박명복 <미인 만들기 회장>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끄레벨 박".
한국 최초의 기능성 속옷을 디자인한 박명복(43)씨를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를 전문 디자이너로 대접하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다.
"맞춤 속옷"이란 신개념을 보편화시킨 주인공이기 때문.
그 브랜드가 끄레벨팜, 이를 만드는 전문기업이 "미인만들기"(회장 박명복)
다.
박 회장이 속옷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지난 82년.
남편을 설득해 서울 평화시장에 작은 양품점을 차리고서부터다.
멋진 속옷들을 전시하자 손님들은 갈수록 늘어났다.
하루 1천만원의 매출이 오를 정도로 장사가 잘 되자 야심이 생겼다.
남의 물건만 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팔고 싶어졌다.
체계적인 공부를 시작키로 결심했다.
속옷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83년 27세의 나이에 남편과 1남 1녀를 뒤로
한 채 이탈리아 밀라노를 찾았다.
1년여간 머물며 여성 파운데이션의 대가인 루치아노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자신이 생기자 서울로 돌아와 디자인을 시작했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동서양인의 신체적 차이를 간과했던 것.
박 회장은 "서양여성의 가슴은 어깨에서부터 시작되나 동양여성은 겨드랑이
선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몰랐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8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디자이너 오아키 밑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다.
여성 맞춤속옷 회사 미인만들기와 끄레벨팜은 이렇게 탄생했다.
박 회장은 입는 것만으로 몸매나 체형을 교정해 주는 옷을 만드는 일을
본격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 여성의 체형을 연구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일본 여성은 다다미식 생활을 한 탓에 엉덩이가 작고 다리가 긴 편.
반면 한국여성은 좌식 생활로 인해 엉덩이가 크고 다리가 짧다.
이 점을 고려해 그는 한국 여성의 체형 특성에 맞는 4백80가지 패턴을
고안해 냈다.
꼼꼼한 봉제기술과 세련된 디자인, 고급 원단을 사용했다.
끄레벨팜이 완벽한 제품으로 나오기까지 4년여간 약 20억원의 개발비가
들어갔다.
끄레벨팜의 품질 및 기능성이 알려지면서 찾는 여성들이 급증했다.
95,96년 무렵에는 월 매출이 18억원으로 당초 목표치의 4배를 웃돌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7가지 다른 품목으로 된 한 세트의 가격은 10만~80만원선.
수백만원대의 고급 외제 속옷 바람을 단숨에 잠재웠다.
끄레벨팜은 97년 기능성 속옷 최초로 한국의류시험연구원으로부터 Q마크를
받았다.
국내뿐 아니라 중국 홍콩 등지로 수출되기도 한다.
미인만들기는 이달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다이어트 속옷"이란 야심작을 개발, 다음달 출시한다.
청주대 의상학과팀과 함께 1년여에 걸쳐 개발한 체중감량용 속옷이다.
라미네이트 직물을 이용한 최초의 이 특수소재 의류는 특허출원중이다.
입어서 불편하지 않고 땀이 나도 불쾌하지 않으며 원하는 체형을 가꿀 수
있게 고안됐다.
대구 섬유기술개발원에서 시험한 결과 쾌적성 착용감 등에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회장의 소망은 단 하나.
언제까지나 맞춤속옷의 대가 "끄레벨 박"으로 남기를 바랄 뿐이다.
(02)529-6765
< 문병환 기자 moon@ >
-----------------------------------------------------------------------
< 성공 포인트 >
1. 역경에서 지혜를 얻었다.
박 회장은 어린 시절 극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캐나다의 한 독지가 할머니가 매달 보내주는 10달러와 사랑의 편지, 어머니
의 간절한 기도가 그를 지탱해 주었다.
학창시절에도 영양실조로 몇차례 쓰러지는 등 곤경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박 회장은 장차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꺾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감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2. 디자인 소재 개발에 과감히 투자했다.
박 회장은 디자인의 차별화를 위해 연구개발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스스로도 경영자보다는 전문 디자이너로 불리길 원한다.
정교하고 섬세한 디자인을 위해 최첨단 컴퓨터시스템을 갖춘 것도 이런
배경.
디자인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이탈리아 에스모다 패션스쿨의 지분을
인수하기도 했다.
이곳에 직원들을 보내 디자인공부를 시킨다.
팬티 브레이저 거들 등 파운데이션에 다수의 의장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3. 장인정신과 남다른 철학이 있었다.
박 회장은 18년여간 여성 속옷을 만드는 일에만 전념해 왔다.
속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체형을 만드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진정한 미는 건강과 자신감에서 우러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건강의 메신저역을 다하겠다는 일념으로 매진해 온 것.
그는 인체공학적 디자인 개발을 늘상 강조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0일자 ).
한국 최초의 기능성 속옷을 디자인한 박명복(43)씨를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를 전문 디자이너로 대접하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다.
"맞춤 속옷"이란 신개념을 보편화시킨 주인공이기 때문.
그 브랜드가 끄레벨팜, 이를 만드는 전문기업이 "미인만들기"(회장 박명복)
다.
박 회장이 속옷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지난 82년.
남편을 설득해 서울 평화시장에 작은 양품점을 차리고서부터다.
멋진 속옷들을 전시하자 손님들은 갈수록 늘어났다.
하루 1천만원의 매출이 오를 정도로 장사가 잘 되자 야심이 생겼다.
남의 물건만 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팔고 싶어졌다.
체계적인 공부를 시작키로 결심했다.
속옷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83년 27세의 나이에 남편과 1남 1녀를 뒤로
한 채 이탈리아 밀라노를 찾았다.
1년여간 머물며 여성 파운데이션의 대가인 루치아노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자신이 생기자 서울로 돌아와 디자인을 시작했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동서양인의 신체적 차이를 간과했던 것.
박 회장은 "서양여성의 가슴은 어깨에서부터 시작되나 동양여성은 겨드랑이
선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몰랐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8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디자이너 오아키 밑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다.
여성 맞춤속옷 회사 미인만들기와 끄레벨팜은 이렇게 탄생했다.
박 회장은 입는 것만으로 몸매나 체형을 교정해 주는 옷을 만드는 일을
본격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 여성의 체형을 연구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일본 여성은 다다미식 생활을 한 탓에 엉덩이가 작고 다리가 긴 편.
반면 한국여성은 좌식 생활로 인해 엉덩이가 크고 다리가 짧다.
이 점을 고려해 그는 한국 여성의 체형 특성에 맞는 4백80가지 패턴을
고안해 냈다.
꼼꼼한 봉제기술과 세련된 디자인, 고급 원단을 사용했다.
끄레벨팜이 완벽한 제품으로 나오기까지 4년여간 약 20억원의 개발비가
들어갔다.
끄레벨팜의 품질 및 기능성이 알려지면서 찾는 여성들이 급증했다.
95,96년 무렵에는 월 매출이 18억원으로 당초 목표치의 4배를 웃돌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7가지 다른 품목으로 된 한 세트의 가격은 10만~80만원선.
수백만원대의 고급 외제 속옷 바람을 단숨에 잠재웠다.
끄레벨팜은 97년 기능성 속옷 최초로 한국의류시험연구원으로부터 Q마크를
받았다.
국내뿐 아니라 중국 홍콩 등지로 수출되기도 한다.
미인만들기는 이달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다이어트 속옷"이란 야심작을 개발, 다음달 출시한다.
청주대 의상학과팀과 함께 1년여에 걸쳐 개발한 체중감량용 속옷이다.
라미네이트 직물을 이용한 최초의 이 특수소재 의류는 특허출원중이다.
입어서 불편하지 않고 땀이 나도 불쾌하지 않으며 원하는 체형을 가꿀 수
있게 고안됐다.
대구 섬유기술개발원에서 시험한 결과 쾌적성 착용감 등에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회장의 소망은 단 하나.
언제까지나 맞춤속옷의 대가 "끄레벨 박"으로 남기를 바랄 뿐이다.
(02)529-6765
< 문병환 기자 moon@ >
-----------------------------------------------------------------------
< 성공 포인트 >
1. 역경에서 지혜를 얻었다.
박 회장은 어린 시절 극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캐나다의 한 독지가 할머니가 매달 보내주는 10달러와 사랑의 편지, 어머니
의 간절한 기도가 그를 지탱해 주었다.
학창시절에도 영양실조로 몇차례 쓰러지는 등 곤경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박 회장은 장차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꺾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감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2. 디자인 소재 개발에 과감히 투자했다.
박 회장은 디자인의 차별화를 위해 연구개발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스스로도 경영자보다는 전문 디자이너로 불리길 원한다.
정교하고 섬세한 디자인을 위해 최첨단 컴퓨터시스템을 갖춘 것도 이런
배경.
디자인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이탈리아 에스모다 패션스쿨의 지분을
인수하기도 했다.
이곳에 직원들을 보내 디자인공부를 시킨다.
팬티 브레이저 거들 등 파운데이션에 다수의 의장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3. 장인정신과 남다른 철학이 있었다.
박 회장은 18년여간 여성 속옷을 만드는 일에만 전념해 왔다.
속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체형을 만드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진정한 미는 건강과 자신감에서 우러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건강의 메신저역을 다하겠다는 일념으로 매진해 온 것.
그는 인체공학적 디자인 개발을 늘상 강조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