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세검정에서 조그만 목욕탕을 꾸려가는 김씨는 되도록 탕안을 들여다
보지 않는다.

손님들이 많을 때는 더 그렇다.

김씨가 이렇게 하는 것은 부끄럼을 타서가 아니다.

목욕중인 손님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서도 아니다.

이유는 물 때문이다.

욕조 위로 철철 넘치거나 쓰지도 않으면서 샤워기에서 마냥 쏟아져 내리는
물을 보고 있자면 그는 애가 탄다.

그렇다고 김씨가 손님들 앞에서 투덜거리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물을 데우느라 돌린 보일러의 기름에 생각이 미치면 그는 가슴이
답답해진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좀 아껴 쓰는 것 같더니 요즘은 옛날과 다를 바 없어요.
목욕문화 이대로는 안된다고 여기 저기서 캠페인 벌인지도 벌써 몇년짼데..."

김씨는 행여 손님들과 마찰이라도 생길까 봐 아예 신경 끄고 살려고 애쓴다.

국제원유값이 배럴당 23달러선을 넘어서는등 하루가 다르게 뛰면서 고유가로
인한 경제의 주름살이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 1일 인상된 휘발유값이 다음달에 또 오른다고 하니 휘발유가격은 사상
최고 수준인 리터당 1천3백원대까지 점프할 우려가 커졌다.

산업계는 산업계대로 에너지 값 상승으로 대다수 공산품의 가격인상 압력을
피할수 없게 됐다.

경제회복을 견인해 오던 수출주력업종에도 고유가는 찬물을 끼얹을 것이
틀림없다.

때맞춰 매스컴은 물가안정에 적신호가 켜졌다며 일제히 경보사이렌을
울려대고 있다.

경제연구소들은 고유가의 충격을 조목조목 분석한 자료를 내놓으며 긴장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국제유가 상승이 한국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제 어지간한 중.고교생도
다 안다.

원유값이 배럴당 1달러만 올라도 무역수지 흑자가 10억달러 이상 줄어든다
거나 소비자물가가 0.09% 오른다는 수치도 낮선 통계가 아니다.

따라서 어지간히 큰 폭으로 뛰지 않는 한 별일 있겠느냐고 무시해 버리는
견해도 있을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유가 동향은 그 파장으로 미루어 볼 때 단순한 일과성 움직임
으로 내리 깎아볼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우선 시기가 좋지 않다는 점이다.

유가충격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일수 밖에 없는 국내 물가는 농산물 값이
폭등한 지난달부터 이미 안정기조가 흔들린 상태다.

또 물가관리에 연중 최악의 시기로 꼽히는 추석이 코 앞에 와 있다.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 대우사태와 자금시장의 불안은 언제라도 금리, 물가를
용수철처럼 튀게 만들수 있다.

국제수준에 비해서는 턱없이 싸다지만 연내 인상이 예고된 공공요금도
하필이면 유가급등에 따른 후유증과 시기가 겹친다.

전세값상승을 기폭제로 불안 조짐이 짙어진 부동산 가격 역시 물가를
위협하고 있다.

유가는 한국경제에 대한 외국의 부정적 시각이 겉히지 않은 싯점에서
상승커브를 탔다는 점에서 불안을 더해 준다.

외국자본이 떼지어 한국을 탈출했던 97년 겨울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달러대
초반에 머물렀다.

원유값이 뛰고 혹한마저 겹쳤다면 당시 한국경제를 덮쳤을 재앙이 어느정도
였을지를 짐작키는 어렵지 않다.

이제 다시 온 고유가 시대를 맞아 정부와 기업, 개인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외환위기가 터진지 2년도 채 안된 지금 우리는 또 다시 많은 교훈을
잊어버리고 있다.

지난해 봄만 해도 사회 전반의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던 절약 근검 재활용등
소중한 정신적 자산의 말들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소비의 구조조정과 의식개혁을 더 이상 미룰수 없다던 소비자운동의 물결도
과소비 거품 속에 묻혀 버렸다.

양보와 희생을 호소하던 정부는 경제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에서
인지 고물가를 겁내지 않는 표정이 역력하다.

내년 총선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다행이지만 물가를 자극할 선심성 정책도
심심찮게 고개를 들고 있다.

한국 비판으로 최근 적지 않은 화제를 뿌린 일본의 경영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는 자신의 애정섞인 코멘트라면서도 IMF체제하의 한국이 아직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환란을 극복한 한국의 저력을 폄하하는 발언이라 듣기에 따라서는 거북한게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비판을 부른 원인도, 비판을 찬사로 바꾸어 놓아야 할
책임도 한국에 있다는 점이다.

조선조의 명재상 황희는 한벌 밖에 없는 관복을 빨아놓은 바람에 세종이
불렀을 때도 남루한 평복차림으로 입궐한 일화를 남겼다.

다시 겸허해져야 한다.

허리띠를 풀고 예전처럼 흥청망청 할때가 아직 아니다.

정부와 기업, 개인 모두가 외환위기와 싸우던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백척간두의 경제위기를 벗어나자며 장롱속 금붙이까지도 내다 모으던 그때
그 각오와 공동체의식을 또 한번 되살려 보자.

내집이 아니라고 목욕탕 물을 마구 흘려 보내도 괜찮다는 저급문화 의식으로
는 고유가 고물가와의 싸움에서 이길수 없다.

< yangsd@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