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개발금융회사 설립 ]

66년9월8일 IFC 의 카이퍼 조사단이 왔다.

일행은 며칠동안 협회 간부들과 구체적 계획을 놓고 협의한 끝에 "개발금융
회사(KDFC)"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67년 초 실무반을 파견, 상주시키기로 약속했다.

카이퍼 사절단이 현지에서 KDFC 설립에 단안을 내린 사유는 이렇다.

먼저 65년 경제사절단이 IBRD 와 IFC 측에 KDFC 설립 의향을 소상히
설명하는 등 적극성을 보인 게 주효했다.

또 설립준비위원회 및 실무진구성 등이 착착 진행된 점도 높이 평가받았다.

마지막으로 카이퍼 자신이 한국 경제인들의 진지하고 단합된 자세에 감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5.16 군사정권이 민정으로 이양되고, 점차 정치 경제가 안정되면서
미국정부의 우리나라에 대한 정책 변경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카이퍼 조사단이 귀임한 지 3개월도 안된 67년1월16일 W 다이아몬드 IFC
개발국장이 실무진과 함께 왔다.

이들은 사무실을 협회 한쪽에 마련하고 우리 담당자들과 함께 일했다.

고문 변호사 헨더슨씨도 같이 왔다.

필자는 고문 변호사와 하루에도 몇차례씩 만나 자본금 규모, 조달책, 임원
구성원칙 등에 대해 협의했다.

고문 변호사는 세세한 것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이를테면 회사 정관안 협의 과정에서 "회의록(Minutes)"에 꼭 "제1초안
(The First Draft)", "제2초안(The Second Draft)"이라고 날짜와 함께
명기했다.

"정관안은 앞으로 여러번 바뀔텐데 그때마다 번거롭게 회의록을 작성하고
내가 서명해야 하오"

이렇게 변호사에 따져 물으니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론
그래야지요"라고 답했다.

이같은 실랑이는 몇차례 반복됐다.

한번은 "이제서야 미국에 변호사가 많은 것을 알겠소. 한국에서는 상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도 미국에서는 변호사의 힘을 빌려야 하니..."라고 농을
하니 그는 파안대소했다.

그러나 협의과정에서 헨더슨의 빈틈없는 업무처리는 1주일도 안되어 그
효용이 나타났다.

그는 필자에게 "당신의 1주일전 주장과 지금 말은 틀리지 않습니까..."

회의록을 내보이면서 지적하는데 할말이 없었다.

필자는 이 변호사의 철저한 사무처리를 동료직원들에게 말하곤 했다.

IFC의 개발금융국장인 다이아몬드씨의 조언, 정부의 협조, 경제계의 지도력,
그리고 사무국의 노력으로 KDFC는 67년4월 드디어 출범하게 된다.

그 전(67년 1월)에 필자는 KDFC 설립사무 일체를 "KDFC 발기인단"에
인계했다.

KDFC 자본금13억5천만원(약 500만 달러).

파격적인 융자조건(연리 4% 10년거치 40년 상환)이었다.

초창기에 수지를 맞출 수 없는 개발금융의 특성을 감안, 사전 작업을 철저히
벌였다.

또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순수 "상법에 의한 회사"로 설립했다.

외국 출자자는 IFC (36.3%)외에 미국 4개 은행, 일본 2개, 이태리, 영국 등
1개은행씩 모두 10개의 세계 굴지 금융기관들이다.

IBRD 와 IFC 이사회는 KDFC 의 출자를 결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부대 결의를
첨부했다.

"IFC는 지금껏 세계 수십개국에서 1백30여개의 프로젝트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그러나 이들 각종 사업은 예외 없이 해당국
정부의 주도로 추진됐다. 한국에서만 우리 IFC가 출자한 KDFC 설립에 있어서
한국경제인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간경제계가 이를 주도했고, 공개 주식모집에
있어서도 조직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경의를 표한다"

개발금융 설립은 경제인협회의 대외협력 능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이때부터 협회의 위상이 높아지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