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정치와 경쟁시장은 닮은 꼴이다.

투표권의 크기가 재산과 소득의 크기에 비례하는 시장과 달리 모든 유권자
에게 똑같이 하나의 투표권을 부여하는 정치 쪽이 더 평등하긴 하지만, 이
두 영역이 "주권재민" 또는 "소비자주권"이라는 동일한 원리에 따라 작동
한다는 것은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포스닥 시장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시장은 "사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제주체들 사이의 경쟁을 통해 사회적
생산을 궁극적으로 소비자의 선호에 맞도록 최적화한다.

한없이 다양한 소비자의 욕구를, 그것을 뒷받침하는 구매력의 크기를 반영
하여 균형있게 만족시키는 것이다.

"정치시장"에서는 모든 정당들이 "득표의 극대화"를 통해 권력을 획득하려고
경쟁한다.

이러한 정당정치 역시 유권자들의 다양하고 때로 상반되는 요구를 균형있게
반영하는 "생산적 정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생산적 정치"가 이론이 아니라 어느 정도라도 현실이 되려면 여러 가지
제도적 조건이 필요하다.

유권자의 절반이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대답했다는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들은 우리 정치가 국민의 다양한 욕구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처럼 많은 국민들이 정치적 괴리감과 소외감, 또는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선거제도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탓이며,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이
선거구제를 포함한 국회의원 선거법이다.

여야 정당들은 너나없이 "21세기 미래형 신당" 건설과 정치개혁을 외치지만
실제 행동을 보면 염불보다는 잿밥에만 눈이 쏠려 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합당 여부는 중선거구제 도입 여부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소선거구제를 당론으로 삼고 있지만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고치려는 생각은 없고 손익 계산에만 골몰하는 모습이다.

지금 우리의 선거법은 기존 여야 3당 카르텔의 산물이다.

제법 높은 득표율을 올려도 지역구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정당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정책정당의 신규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득표의 지역적 집중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공세적 또는 방어적 지역주의를
선거전략으로 삼는 기존 정당에게 유리하다.

유권자의 수가 최고 4배 차이가 나는 현행 선거구제는 만인에게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하는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정신에 위배된다.

이런 상태에서 정당과 국회가 각계각층 국민의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와
정책적 요구와 소망을 제대로 반영하고 만족시키는 "생산적 정치"를 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여야가 진정 생산적 정치를 추구한다면 기존의 "과점적 정치 공급자"로서
부당하게 누려온 기득권을 포기하고 선거제도부터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

그 핵심은 "정치시장"의 진입장벽을 대폭 낮추어 정당의 진입과 퇴출을
수월하게 하고, 국민들의 정당 지지도가 국회의 의석구조에 그대로 반영
되게끔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독일식 정당명부제"와 같은 것을 도입하여 정당의 의석비율이
정확히 정당 득표비율과 일치하도록만 한다면 한 선거구에서 몇 명을 뽑든
별로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는가.

남들에게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요구하면서 자기네는 공정한 경쟁과 신규
공급자의 진입을 방해하는 "카르텔 선거법"의 기본틀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정당들의 후안무치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

< denkmal@hite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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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년 경북 경주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졸
<> 독일 요하네스 구텐베르그대학 경제학 석사
<> 한국학술진흥재단 기획실장
<> 현 성공회대 겸임교수
<> 시사평론가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