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맥주의 토니 데스멧 사장은 직원들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직접 직원들의
책상 앞으로 찾아간다.

예고없는 방문에 직원은 앉은 채로, 사장은 서서 마치 동료처럼 자연스레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한국 기업에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다.

종전의 층층시하 결재과정은 사라져 버렸다.

조직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졌다.

영어로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가 아니면 OB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서바이벌(Survival)''은 직원들이 요즘 가장 실감있는 단어다.

업무 스트레스만큼이나 영어 스트레스는 무겁다.

얼마전 한 직원이 데스멧 사장에게 "영어에 능통한 사람과 영업능력이
뛰어난 사람중 누구를 택하겠는가"고 질문하자 그는 "영어는 선택조건이 될
수 없다"고 말해 줬다.

결재서류를 비롯한 모든 서류가 영어로 작성된다.

전표보다는 "슬립(SLIP)", 출고가보다는 "익스팩토리 프라이스(EX-FACTORY
PRICE)", 거래처보다는 "퍼스트 레이어(1ST LAYER)"가 OB 직원들에게는 이제
더 익숙하다.

지난해 9월 1일 두산과 벨기에 맥주회사 인터브루간 50 대 50의 합작기업
으로 바뀐지 1년 1개월.

한국의 대표적 맥주회사인 OB맥주는 이처럼 한국 속의 서양기업으로 탈바꿈
했다.

영어가 "공용어"가 된 것 이상으로 변화의 폭은 크다.

먼저 점심시간이 달라졌다.

외식을 해야 직성이 풀리던 직원들이 외국인 임원들처럼 햄버거나 샌드위치
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는 것은 흔히 보게 되는 풍경.

전날 과음한 사람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낮잠을 즐기는 것은 옛말이 됐다.

점심시간도 근무시간이라는 서구문화가 OB에 끼친 영향이다.

쓸데없이 야근하던 풍조도 사라졌다.

"정해진 시간에 효율적으로 충실히 일하는" 쪽으로 의식과 관행이 바뀌었다.

야근을 하려면 팀장에게 이유를 미리 말해야 한다.

생산현장의 관리감독은 더욱 철저해졌다.

이제는 생산실적의 데이터화, 노동력의 비용 환산으로 팀의 생산성을 검증
받아야 한다.

"업무정의(Job Description)"가 분명해졌고 책임소재 또한 명확해졌다.

마케팅은 OB맥주의 세계화를 전제로 이뤄진다.

"OB라거"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워 나간 전략 아래 일단은 국내시장에서의
브랜드 리더십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주류업계 최초로 스포츠 마케팅을 도입하는가 하면 다양한 선진기법을
이용해 소비자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보이고 있다.

OB 외에도 외국인이 사장 자리에 앉으면서 크게 변한 곳들은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 중 하나가 클라크 머티리얼 핸들링 아시아(CMHA).

이 회사는 미국 클라크사가 삼성중공업의 지게차 부문을 인수해 설립한
곳이다.

적극적이고 활달한 케빈 리어든 사장은 국내 시장점유율을 대폭 높이면서
지게차 부문 국내 1위 자리를 넘보고 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직원들 책상에 걸터앉아 농담을 주고받는 것.

자유스러운 사내 분위기를 조성해 직원들의 창의성을 최대한 이끌어내고
있다.

각 부문 담당자들에게 전권을 부여하되 책임도 함께 지도록 함으로써
직원들이 "이 회사가 곧 내 회사"라는 생각을 갖도록 하고 있다.

지난해 7월 회사 출범 당시 창원의 장복산 정상에서 도포 차림에 갓을 쓰고
고사를 드려 화제가 됐던 볼보건설기계코리아의 토니 헬샴 사장.

전자메일 통신인 "CEO 대화방"을 마련, 직원들과 회사경영에 관해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는다.

볼보는 IMF체제 이전 20대에 달하던 회사 승용차를 2대로 줄이는가 하면
잉여인력을 과감히 감축하는 등 합리적인 경영의 일면을 보여 줬다.

IMF체제 이후 국내에 진출한 외국경영진은 권위주의적이며 관료적인 한국의
기업문화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이들은 서구의 합리성을 토대로 좋은 성적을 거둠으로써 한국식 경영의
고정관념을 깨고 있다.

외국인 사장이 아니더라도 외국자본과 손잡은 기업들은 회사의 컬러가 많이
달라졌다.

"투명성" "수익 중시" 등이 이들의 공통된 경영방침이다.

효성과 한화의 지분을 인수한 한국바스프는 전형적인 모델이다.

팀별 책임경영체제로 전환해 철저히 수익 위주로 경영한다.

독일 본사의 까다로운 회계기준을 각 팀에 적용, 투명성을 높였다.

한화나 효성과 합작으로 사업할 때보다 접대비와 기밀비가 대폭 줄었다.

직원윤리강령도 만들어 놓았다.

LG텔레콤도 영국의 브리티시 텔레컴(BT)과 제휴한 뒤 불필요하고 불명확한
지출을 많이 줄였다.

기사를 두고 업무용 차량의 뒷좌석에서 점잖게 폼을 재던 임원들은 지금은
직접 차를 몬다.

합리성으로 무장한 이들 기업의 경영실적이 꼭 좋아지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독일의 모기업으로부터 아시아 최우수 경영혁신(CIP) 업체로 선정된 FAG
한화베어링처럼 실적 호전이 뚜렷한 곳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직 "탐색단계"다.

진출후 이제 1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기업들이 많기 때문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발을 들여 놓은 서구식 경영이
얼마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관심거리다.

< 채자영 기자 jychai@ >

[ IMF이후 주요 외국인 인수-합작사 (괄호안은 대표자) ]

<> 홍농종묘(김병환) : 세미니스 지분 인수후 아시아지주회사화, 종자수출
21% 증가 연구개발비 45% 증액, 2001년까지 125억
투자

<> 한국HP(최준근) : 삼성지분 인수, 98년 매출 8,320억 본사의 MBO(목표
관리) 활용, 여성적 매니지먼트

<> 한국하니웰(권태웅) : LG지분 인수, 99년 매출 1,400억, 경상이익 10억
예상, 사업부별 경영, 인사 재경 전문화

<> 한화FAG베어링(송재복(한화) 윤풍(독일)) : FAG의 한화베어링 인수로
합작사 설립, 99년 경상이익
350억 예상, FAG의 아시아
최우수 경영혁신 업체

<> 볼보건설기계(토니 헬샴) : 삼성중 자산인수, 99년 매출 3,800억 예상,
수출 65%, 매트릭스조직, 글로벌전산망

<> 클라크(케빈 리어든) : 삼성중 자산인수, 99년 매출 1,276억, 경상이익
39억 예상, ''NEW A/S'' 도입

<> 보워터 한라제지(한상량) : 한라측 자산인수, 99년 이익 20억 예상
다국적 기업형 공장관리, 분사와 화상회의

<> 팝코전주(선우영석) : 한솔의 신문용지사업부, 캐나다 노르웨이 등
3사 합작, 99년 매출 6,000억, 세전이익 200억
예상, 이사회중심, 월드베스트 어워드 수상
(능률협회)

<> OB맥주(토니 데스멧) : 인터브루와 OB가 합작, OB맥주 세계화 선언,
99년 상반기 매출 4,019억, 경상적자 250억

<> 한국바스프(류종열) : 한화/효성 지분인수, 99년 매출 1조, 순익 250억
예상, 팀별 경영체제, 독일본사 회계기준 및 환경
기준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