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객들은 강호에 들어가 언젠가는 최고의 고수가 되기를 꿈꾼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혼자만의 황량한 고독을 견디면서 숲속 이곳저곳을
떠돈다.

그러다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피를 내 의형제를 맺기도 하고
진정한 고수를 만나 스승으로 따르기도 한다.

때로 검객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주인을 위해 기꺼이
자객이 되어 달빛이 비치는 밤, 소리도 없이 담벼락을 넘기도 한다.

이들은 신의를 위하여 손가락을 자른다거나 머리카락을 자르는 원형적
상징적 죽음을 치르기도 한다.

옛날 사랑하는 남녀가 헤어지면서 거울을 쪼개 갖고 있다가 나중에 이를
맞추어보고 서로를 알아본다거나 고구려의 유리가 친부를 찾기 위해 주몽에게
신표로서 부러진 검을 맞추어 보게 한 것도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신표라는 것은 "뜻을 함께"하는 자들끼리 서로를 알아보는 징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신표를 만들기 위하여 더 이상 피를 내 마시거나
머리카락이나 손가락을 자른다거나 거울을 쪼개 그 깨진 형상대로 맞추어
보지 않는다.

이 시대의 신표는 문화 향유자들의 소통경로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다.

"너 비틀즈를 좋아하니?" "응, 나 좋아해"

그들은 비틀즈라는 신표를 서로 쪼개서 갖고 있는 셈이다.

혹은 하루끼라는 신표를, 혹은 최진실이라는 신표를 나누어 가지고 있다.

내적 욕망의 촉발로서 결속된 이들은 때로 영화에, 애니메이션에, 혹은
대중가수라는 집에 숙박한 채 정보를 교환하며 일군의 움직임을 이루어간다.

이렇게 형성된 일군의 문화향유자들은 서로의 눈빛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신표를 나누어 가진 채 가끔씩 쪼개진 거울을 품에서 꺼내 맞추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과도한 폭식성으로 다가오고 있는 후기산업사회의 전방위적인 공격
에서 어느 존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포스트모던한 현상으로 끊임없는 차이가 변화라는 이름으로 양산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없이 스타일적인 탈바꿈만을 하는 "진부한 내부"를 우리 모두가
순회하고 있다는 점이다.

HOT라는 신표를 가진 소녀들이 클럽과 지부를 만들고 또 한 소녀가 그
신표를 가슴에 안은 채 쓰러져 죽었지만 사실 이전에 HOT는 소방차거나
서태지였다.

아니 그것이 역사적 의미를 함유할 때 박정희거나 단군이 될 수도 있다.

실재가 아닌 그림자 혹은 가상적인 환상이 실체적 진실보다 더 진실의
순도를 떠올릴 때가 있다.

이러한 문화의 이미지가 뿜어내는 광휘에 일순 숨을 멈추기도 한다.

그러나 기실 우리들 끼리끼리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 신표들은 다 같은
모양으로 쪼개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성이란 독점자본주의 시대에는 "몰개성"의 다른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중가수의 공연을 보고 온 후 소녀가 자살한 사건은 대중의 광기가 대중의
무기력과 얼마나 정교하게 만나고 있나를 보여주는 실례다.

이것은 컴퓨터의 시뮬레이트 된 세계가 넓고 광대한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지
만 동시에 새로운 자폐의 문안으로 인도하는 아이러니와도 만나는 지점이다.

현실을 시뮬레이트해서 보여주는 영화나 게임에 빠지면 환각에 즉각적으로
감염된다.

어떤 반성이나 역사성과의 연계설정도 차단된 채 인공의 유토피아를 위해
현실의 디스토피아를 은폐한다.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대개 남자들은 자신이 현실에서 패배했다고 느낄 때 도봉산을 오르거나
미아리를 찾는다.

산이라는 자연은 모든 인간적 폭력성을 순화시켜주는 넉넉한 어머니를
연상시킨다면 미아리 거리의 여성들은 관능의 극치에서 현실을 환각적으로
잊게 해준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여성의 품과 어머니의 품이 구별될 수 있겠는가.

절망한 남자는 남루한 유곽여성의 가슴팍에서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가
된다.

이제 남자는 도봉산도 미아리도 가지 않는다.

그는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 안에 있는 아름다운 그녀가 남자를 위로하고 위무하고 자극한다.

실제의 살갗에 가 닿으려고 하지 않은 채 관음증이나 페티시가 욕망을
증폭시킨다.

이미지로서의 환의 세계가 실체를 대신하는 세계, 허구와 현실이 뒤섞여
있는 세계에서 주체는 환각에 관리당한다.

스크린의 틈을 찢고 나의 진정한 "신표"를 찾아오는 것, 그렇게 될 때
이미지에 잠긴 세상에서 내 얼굴을 꺼내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 yhkim@ptuniv.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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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이화여대 국문학 박사
<>평택대 교수
<>저서:기호는 힘이 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