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한 아이디어다.

29인치 텔레비전, 김치냉장고, 전기밥솥.

울산 동구 선관위의 경품 목록이다.

오는 28일 실시되는 구청장 보궐선거에 대비한 "묘책"이란다.

이 희한한 경품잔치의 목적은 투표율을 높이는 것이다.

선관위의 희망사항은 소박하다.

"최근 실시된 기초자치단체장 보궐선거 투표율이 20-30%에 머물러 선거의
의미가 훼손되고 당선자의 대표성에도 문제가 있다"

"경품행사 덕분에 투표율이 40%를 넘어서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선관위가 선거관리만 엄정하게 하면 그만이지, 오지랖 넓게 투표율 걱정은
왜 할까.

투표율이 낮은 걸 고민해야 할 책임자는 여야 정당과 정치인들이 아닐까?

엉뚱한 말 같겠지만 투표를 하는 건 별로 "합리적"이지 않다.

선관위는 "당신의 귀중한 한 표"라고 하지만, 나의 한 표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예컨대 나는 수천만 명이 참가하는 대통령 선거에서 내 한 표가 당락을
가르리라고 믿지 않는다.

수십만 명이 참가하는 국회의원 선거나 구청장 선거도 다르지 않다.

반면 투표를 하지 않을 이유는 많다.

우선 그 정당이 그 정당 같고 그 후보가 그 후보 같은 경우, 누가 되든 별
상관이 없기 때문에 투표할 필요가 없다.

좋아하는 후보가 있지만 우열이 너무나 뚜렷해서 결과를 훤히 예측할 수
있는 경우에도 그렇다.

특히 보궐선거일은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먹고살기 바쁜 사람은 투표를
할 수 없다.

이러한 "무임승차형" 또는 "생계형" 말고도 투표를 하지 않을 "합리적"인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기존정당과 후보들이 나의 요구를 전혀 대변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투표율을 낮춤으로써 그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이건 적극적인 "항의형" 기권이다.

우리의 대의정치가 부자와 권력자들만을 위한 행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
투표를 거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런 유형은 "반체제형" 또는 "냉소형 기권"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정치에 원래부터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무관심형"이다.

지난 번 고양과 용인시장, 광주 남구청장 재보궐선거의 투표율은 30%대에
머물렀다.

투표하지 않은 70%가 어떤 유형의 기권자인지 알아낼 방법은 없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생산적 토론이 아니라 감정 싸움으로 일관해
온 여야 정당의 행태와 줄을 있는 민선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비리사건을 고
려하면 "항의형"과 "냉소형" 기권자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 주 정치권의 풍경을 볼 때 울산 동구청장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관심이
되살아날 것 같지 않다.

평가받기 싫어하는 국회의원들은 시민단체의 국감 모니터 요원들을 내쫓아
버렸다.

언론개혁을 위한 정책 개발은 외면하고 신문의 비판적 정치칼럼을 누그러
뜨리는 데 집착해서 온갖 추태를 부린 문화부 장관의 대통령 공보수석 시절
행적이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야당은 국민 여론은 알 바 없이 중앙일보 사태를 "언론탄압"으로 규정하고
국회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관위의 경품이 어떤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유혹"해낼 수
있을까?

"생계형"이나 "무관심형" 또는 "무임승차형"을 일부 불러내긴 할 것이다.

하지만 10여 점의 가전제품을 가지고 "항의형"과 "냉소형" 유권자들에게는
약발이 들을 것 같지가 않다.

게다가 선관위의 "묘책"은 윤리적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기권을 하나의 정치적 의사표현으로 인정한다면 경품은 유권자를 "매수"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은 애교로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중앙선관위가 내년 총선에서 똑같은 아이디어를 들고 나오는 사태
만은 없기를 바란다.

투표율 올릴 책임을 정치권에 맡겨두는 게 좋다.

< 시사평론가/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