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국민들에게 "재벌"은 "경제력 집중"을 상징하는 기호다.

동시에 "믿을만한 제품", "안정된 일자리"를 암시하는 기호이기도 한다.

이같은 중의적 이미지를 두고 강봉균 재정경제부 장관은 "재벌에 대한
인식의 이중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결국 재벌이 야누스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재벌은 공과 과,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지닌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재벌의 진화를 논하기에 앞서 "한국경제에 재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하는 화두부터 풀어야 한다"(유승민 KDI 연구위원)고 충고
한다.

이 화두를 풀기 위한 논의는 "재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이에대해 재벌의 원산지인 일본 학자들은 자이바쓰(재벌)를 "가족 내지는
동족에 의해 봉쇄적으로 소유되어 있는 다각적인 사업 경영체"(핫토리
타미오 도쿄경제대학 교수)로 규정하고 있다.

키워드는 "가족지배와 다각화"다.

그렇다면 재벌은 왜 생성됐는가.

가장 유력한 설명으로는 "거래비용이론(transaction cost theory)"이 원용
된다.

시장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신뢰의 부족 등으로 유발되는 거래비용을 낮추기
위해 스스로 관련기업을 만들어가다 보니 재벌체제가 형성됐다는 얘기다.

기업비밀의 유출을 막기 위해 광고회사를 세우는게 단적인 예다.

도쿄대학의 나카가와 게이이치로 교수같은 이는 여기에다 "후진국의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배경을 그려넣기도 한다.

"재벌체제는 전통적 사회가 강력한 공업화를 급속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다각적인 기업집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재벌체제는 한국뿐 아니라 홍콩,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발견된다.

본론으로 넘어가 재벌이 한국경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는 계량적, 비계량적
측면에서 두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계량적 측면에서는 국민총생산에서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표적
지표다.

한국경제연구원 최승노 박사에 따르면 30대 그룹이 창출한 부가가치가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15% 선이다.

또 전체 취업인구중 4-5%를 고용하고 있다.

그만큼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재벌의 역할이 크다는 의미다.

물론 재벌 비판론자들에게는 이 수치가 "경제력 집중"의 심각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또다른 지표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성장속도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자동차산업의 경우 지난 80년대중 완제품 생산업체와 부품 공급업체는
연평균 34퍼센트 정도로 동반 성장해 왔다.

대기업의 성장과 중소기업의 성장이 결코 동떨어질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다.(공병호 자유기업센터 소장)

비계량적 측면에서도 재벌은 국민경제에 큰 의미를 갖는다.

인재양성이 바로 그것이다.

웬만한 그룹이라면 연수원을 갖고 있다.

물론 그룹체제가 아닌 기업이 인재육성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문제는 "인력양성에도 "규모의 경제"가 존재한다"(유한수 전경련 전무)는
점이다.

단일 기업 차원의 연수보다는 그룹 연수체제가 휠씬 저렴한 비용으로 양질
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인력배치 면에서도 그룹구조는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잉여인력이 발생하는 경우 한국 기업들은 미국 기업처럼 감원이나 해고가
쉽지 않았다.

이에 그룹들은 다른 계열사로의 전환배치를 통해 그룹구조를 일종의 "내부
노동시장"으로 활용해 왔다.

이런 면에서는 그룹구조가 미국처럼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발달하지 못한
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볼 수도 있다.

물론 대다수의 국민들은 재벌체제의 이같은 긍정적 측면보다는 정경유착,
금융자산 독식, 시장지배력 남용, 경영권의 편법세습 같은 부정적 측면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다.

실제로 그같은 폐해가 한국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했던 것도 사실
이다.

그러나 "재벌체제의 장단점에 대한 냉철한 분석없이 무작정 개혁의 대상
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그릇된 신념에 기초한 오도된 열정"(공병호
자유기업센터 소장)이라는 지적이다.

< 임혁 기자 limhyuck@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