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재벌(기업집단) 해체가 잘못된 정책이라는 비판이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들에 의해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태런 캐나 교수와 크리시나 패일푸 교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8.9월호"에 공동기고한 "이머징 시장에서 대기업집단을
리스트럭처링하는 올바른 방법"(The Right Way to Restructure Conglomerates
in Emerging Markets)이라는 논문에서 개도국의 올바른 구조조정은 성급한
재벌 해체가 아니라 금융 노동 등 시장시스템이 원활하게 기능하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재벌이 개도국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로 성장을 위해선
재벌 체제를 해체해야 한다는 국제기관이나 금융가, 학계 주장과는 정반대의
견해다.

특히 서구 학계를 이끌고 있는 핵심부에서 이런 비판이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이에따라 재벌 해체가 한국 경제 성장의 전제조건이라는 논리적 바탕위에서
추진되고 있는 한국의 대재벌정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 재벌해체는 부작용이 크다 =캐나 교수 등은 서구 금융전문가들의 개도국
대기업집단 구조조정에 대한 견해는 자산을 매각, 막대한 부채를 빠르게
줄여 나가는 동시에 거대조직 해체를 통해 비효율성을 줄이고 기업가정신을
높인다는 것으로 요약할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비록 선의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기능하는
시장제도가 짧은 시간내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아
논리적인 결함이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한국 칠레 인도 등 개도국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결과 성장을
위한 "소프트 인프라스트럭처"를 만들기 위해선 최소한 10년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프트 인프라에는 금융 경영자 고용 기술 시장 등이 포함되며 선진국은 잘
발달한 투자은행, 회계회사, 경영대학원 등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반면 개도국에는 이들 인프라가 미비하며 재벌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재벌은 개도국에서 시장기구를 대신하는 역할까지 수행하면서 많은 부가가치
를 창출해 내고 있다.

대부분 개도국에서 기업집단은 세가지 방법을 통해 부가가치를 만들어 낸다.

첫째는 새로운 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벤처 캐피털 역할이다.

한국처럼 벤처자본가와 같은 전문적 자본 중개시장이 발전되지 않은 곳에서
재벌은 신규사업을 위한 중요한 자금조달및 운용원의 역할을 해왔다.

둘째는 재벌이 노동시장 기구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한국과 인도, 칠레 같은 국가에선 경영자와 경영기술에 대한 수요는 공급을
훨씬 초과한다.

이런 상태에서 한국의 삼성 같은 대기업들은 그룹내부의 노동시장을 통해
경영관리자를 길러내 활용했다.

셋째론 세계적 품질과 고객서비스를 유지할수 있는 브랜드 개발로 가치를
창출한다.

한국의 삼성이나 인도의 타타, 터키의 코치 그룹등은 규모를 활용해 브랜드
를 키우는데 성공했다.

시장기구 작동이 미흡한 상황에서 빠르게 진행되는 재벌 해체작업은 부작용
을 초래하고 자국내에서 효율적 시장기구를 활용할수 있는 서구 기업들에
비해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킬 것이다.

또 제대로 된 소프트 인프라가 역할을 하기까지 10년동안 서구에서는 당연시
여기는 소프트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는 어떠한 제도도 남지 않게 될수
있으며 따라서 경제는 오히려 뒷걸음칠수 있다고 캐나 교수 등은 강조했다.

<> 먼저 시장 인프라를 만들라 =따라서 개도국이 먼저 해야할 일은 시장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미국 금융시장을 예로 들면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투자자들이 기업공시
정보에 의존할수 있도록 확고한 기준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들은 기업에 대한 자금의 시장배분기능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경영자를 훈련시킬수 있는 수많은 경영대학원의 존재는 미 관리자 인력시장
의 역동성에 기여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금융시장은 투자자들이 믿고 투자할만한 회계.감사 시스템이
돼있지 않으며 중국에서도 번듯한 증권거래소가 있지만 자본의 효과적인
조달창구로선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 정부.정치권은 장기플랜을 =만약 정치권이 소프트 인프라를 만들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행과정이 쉽지는 않다.

개도국중 가장 효율적인 자본시장을 갖고 있는 칠레의 사례를 보자.

칠례의 자본시장 구축은 25년에 걸쳐 이뤄졌으며 지금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칠레의 경험은 정부가 시장으로부터 한발짝 물러서 있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

정부의 관여는 은행이 신용분석과 같은 핵심적이며 기본적인 소프트 인프라
를 발전시키는데 장애가 되며 은행이 금융위기를 처리하는 노하우를 습득할
수 없게 만든다.

한국 정부가 칠레의 성공을 따르려면 재벌을 해체하기보다는 금융 노동
상품과 서비스등 시장 기구가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장기 개혁에
중점을 둬야 한다.

<> 재벌의 능력은 강화돼야 =개도국의 재벌은 해체를 통한 퇴출보다는 구조
조정을 통해 좀더 기능이 강화돼야 한다.

이를위해 첫째 경영전략을 "선 성장, 후 수익성" 중심에서 "수익성이 확보
된 성장"으로 바꿔야 한다.

서구 기업들이 중시하는 인센티브 시스템을 확립할 필요가 있으며 경제적
부가가치(EVA) 등 수익성 중심의 경영을 해야 한다.

또 특정한 사업을 어떻게 포기할 것인가를 배울 필요가 있다.

철수하는 사업으로부터 노하우를 얻어야 한다는게 이들 하버드 교수의
지적이다.

<> 칠레의 사례에서 배워라 =70년대 초반까지 칠레정부는 자국의 경제를
통제하고 있었다.

국가 금융자산의 약 85%가 정부소유였고 노동시장은 정부와 협력관계에
있는 노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으며 정부가 가격수준을 결정하고 있었다.

73년 아옌데 정부가 몰락한 후 칠레는 국가 금융시스템에 초점을 맞춘
시장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그 결과 칠레의 자본시장은 개도국의 성공사례중 하나가 됐다.

칠레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신속하게 움직이는 연금기금산업을 출범시킨데
있다고 할 수 있다.

81년 칠레 정부는 12개 기관투자가와 연금관리공단 등을 출범시켰고 모든
납세자는 자신이 가입한 기금에 매달 일정수입을 투자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정부는 투자경험이 없는 투자자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85년초 칠레연금관리공단은 자국내에서 투자를 시작했다.

칠레정부는 92년 연금관리공단의 투자 대상을 외국 자본으로 확대했다.

93년부터는 자국내 벤처 투자도 허용했다.

< 정리=강현철 기자 hckang@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