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화합 현장을 가다] '세림제지'..믿음으로뭉친 열린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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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2년 6월 9일.
업계에서 공장가동률이 가장 높다던 세림제지의 설비가 일제히 멈춰섰다.
기계고장이나 천재지변 때문이 아니었다.
임금협상이 결렬되자 근로자들이 일손을 놓고 전면파업에 들어간 것이다.
89년 6월 노조가 설립된지 꼭 3년만이었다.
모든 생산라인을 정지시킨 근로자들은 공장앞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회사측도 이에 맞서 서울 본사 직원들까지 동원, 구사대를 조직해 팽팽하게
맞섰다.
공장은 4일간 섰고 매일 수억원씩의 생산차질액이 생겼다.
납기일을 맞추지 못해 입은 간접적인 피해도 상당했다.
파업이 남긴 손실은 중소기업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타격이었다.
근로자들도 파업기간 동안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적용되면서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4일간의 파업은 세림제지 노사에게 충격이자 사고의 전환점이 됐다.
노사 양쪽은 그제서야 대화의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노사 간부들은 매일 아침 출근하자 마자 "티 타임"을 가졌다.
별 안건이 없어도 노사협의회를 매달 열었다.
전 임직원이 참가하는 "노사화합 극기대회"를 열어 함께 산을 오르면서
신뢰감을 키워갔다.
잦은 만남과 대화의 효과는 의외로 컸다.
서로 상대방의 고충을 이해하고 진정한 파트너로 인식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노무관리에 "문외한"이었던 회사는 노무관리 전담부서를 설치했다.
인사고과 때 부하 직원과의 면담을 의무화해 직원들의 불만을 줄였다.
3급(대리급) 이상으로는 승진할 수 없었던 현장 생산기능직 사원도 1급
(부장)까지 올라갈 수 있게 했다.
근무부서 배치 및 전환, 승진 및 상벌 등을 사전에 노조와 협의해 노조의
참여 폭을 확대했다.
매달 손익상태와 경영상황, 생산 및 판매실적을 노조측에 공개했다.
노조도 달라졌다.
93년 노사협력을 선언했다.
노사협력선언은 95년과 97년에도 이어졌다.
이에 힘입어 이 회사는 93년 이후 현재까지 무분규 사업장이 됐다.
98~99년에는 주문이 밀리자 노조가 자진해서 3일씩인 추석과 설 명절을
반납하기도 했다.
세림제지는 노사협력을 바탕으로 IMF위기도 어렵지 않게 극복했다.
이 회사는 외환위기가 닥치기 1년전인 96년 자체적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4백50여명의 근로자 가운데 15%가량인 70여명이 명예퇴직했다.
하지만 노사합의를 통해 명예퇴직 인원과 대상을 선정해 불만의 소지를
줄였다.
적정한 감축인원을 산정하기 위해 회사간부와 노조위원장이 직접 동종업계를
돌아다니며 실태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막상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
긴축운영과 원가절감 노력 등 허리띠를 조금 졸라매는 것만으로 "IMF 터널"
을 통과했다.
다른 회사가 정리해고 등으로 분규를 겪던 98년에도 이 회사는 근로자들에게
상여금 1천%외에 별도의 성과급까지 나눠줬다.
올 상반기에도 특별 성과급 50%를 지급했다.
노사협력은 경영이익으로도 이어졌다.
97년에 5백5억원이던 매출액이 98년에는 1천1백59억원으로 2배 이상 뛰었다.
당기순이익도 24억여원에서 49억여원으로 늘어났다.
세림제지는 연말까지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도입할 계획이다.
또 21세기 비전인 "SR-V-2000"을 통해 새천년에는 판지업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 달성=이건호 기자 leek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8일자 ).
업계에서 공장가동률이 가장 높다던 세림제지의 설비가 일제히 멈춰섰다.
기계고장이나 천재지변 때문이 아니었다.
임금협상이 결렬되자 근로자들이 일손을 놓고 전면파업에 들어간 것이다.
89년 6월 노조가 설립된지 꼭 3년만이었다.
모든 생산라인을 정지시킨 근로자들은 공장앞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회사측도 이에 맞서 서울 본사 직원들까지 동원, 구사대를 조직해 팽팽하게
맞섰다.
공장은 4일간 섰고 매일 수억원씩의 생산차질액이 생겼다.
납기일을 맞추지 못해 입은 간접적인 피해도 상당했다.
파업이 남긴 손실은 중소기업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타격이었다.
근로자들도 파업기간 동안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적용되면서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4일간의 파업은 세림제지 노사에게 충격이자 사고의 전환점이 됐다.
노사 양쪽은 그제서야 대화의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노사 간부들은 매일 아침 출근하자 마자 "티 타임"을 가졌다.
별 안건이 없어도 노사협의회를 매달 열었다.
전 임직원이 참가하는 "노사화합 극기대회"를 열어 함께 산을 오르면서
신뢰감을 키워갔다.
잦은 만남과 대화의 효과는 의외로 컸다.
서로 상대방의 고충을 이해하고 진정한 파트너로 인식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노무관리에 "문외한"이었던 회사는 노무관리 전담부서를 설치했다.
인사고과 때 부하 직원과의 면담을 의무화해 직원들의 불만을 줄였다.
3급(대리급) 이상으로는 승진할 수 없었던 현장 생산기능직 사원도 1급
(부장)까지 올라갈 수 있게 했다.
근무부서 배치 및 전환, 승진 및 상벌 등을 사전에 노조와 협의해 노조의
참여 폭을 확대했다.
매달 손익상태와 경영상황, 생산 및 판매실적을 노조측에 공개했다.
노조도 달라졌다.
93년 노사협력을 선언했다.
노사협력선언은 95년과 97년에도 이어졌다.
이에 힘입어 이 회사는 93년 이후 현재까지 무분규 사업장이 됐다.
98~99년에는 주문이 밀리자 노조가 자진해서 3일씩인 추석과 설 명절을
반납하기도 했다.
세림제지는 노사협력을 바탕으로 IMF위기도 어렵지 않게 극복했다.
이 회사는 외환위기가 닥치기 1년전인 96년 자체적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4백50여명의 근로자 가운데 15%가량인 70여명이 명예퇴직했다.
하지만 노사합의를 통해 명예퇴직 인원과 대상을 선정해 불만의 소지를
줄였다.
적정한 감축인원을 산정하기 위해 회사간부와 노조위원장이 직접 동종업계를
돌아다니며 실태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막상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
긴축운영과 원가절감 노력 등 허리띠를 조금 졸라매는 것만으로 "IMF 터널"
을 통과했다.
다른 회사가 정리해고 등으로 분규를 겪던 98년에도 이 회사는 근로자들에게
상여금 1천%외에 별도의 성과급까지 나눠줬다.
올 상반기에도 특별 성과급 50%를 지급했다.
노사협력은 경영이익으로도 이어졌다.
97년에 5백5억원이던 매출액이 98년에는 1천1백59억원으로 2배 이상 뛰었다.
당기순이익도 24억여원에서 49억여원으로 늘어났다.
세림제지는 연말까지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도입할 계획이다.
또 21세기 비전인 "SR-V-2000"을 통해 새천년에는 판지업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 달성=이건호 기자 leek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