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사업을 하는 김모(55)씨는 최근 보험사 임원인 절친한 친구 A씨로부터
황당한 제안을 받았다.

경기도 광주에 1만여평 짜리 임야가 있는데 김씨 명의로 등기를 돌려달라는
얘기다.

땅 뿐이 아니다.

현금도 부탁했다.

김씨 명의로 예금을 들되 비밀번호는 자신이 알고 있겠다는 것이다.

A씨가 다급하게 이런 제안을 내놓게 된 사연은 간단하다.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다.

빚 보증을 잘못 서거나 부도를 내서가 아니다.

예금보험공사가 부실 금융기관 임원들을 대상으로 재산실태 파악에 나섰기
때문이다.

부실하게 경영해 고객의 돈을 정부가 대신 물어준 만큼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것이다.

예금보험공사는 이미 8개 종금사 임원들의 재산을 가압류한 상태다.

<> 다급해진 임원들 =IMF(국제통화기금) 한파의 와중에서 퇴출당한 금융
기관이나 예금보험공사로부터 공적자금을 받은 금융기관의 전현직 임원들은
좌불안석이다.

언제 "재산 가압류" 쪽지가 날아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금보험공사는 "퇴출된 5개 은행과 보험사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데 이어
1백30개 금융기관에 대해 전면적인 조사를 벌이겠다"고 18일 발표했다.

은행과 보험 뿐 아니아 상호신용금고와 신용협동조합도 대상이다.

대상이 되는 임원들만 7백여명에 달한다.

이런 소문은 진작부터 퍼져 전현직 금융기관 임원들이 모인 자리의 화제는
단연 "재산 감추기"였다.

A씨처럼 불법인줄 알면서도 "명의신탁"을 동원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가까운 친척이나 믿을만한 친구에게 재산을 돌려놓는 것이다.

일찌감치 상속을 해버리는 사례도 있지만 채무가 대물림된다는 말에 속을
태우는 사람들도 있다.

퇴출당한 B은행의 전직 이사 C씨는 막다른 골목을 택한 케이스.

부인 명의로 재산을 돌려 놓고 서류상으로 이혼을 했다.

조사과정에서 들킬 가능성을 우려해 실제로 별거하며 출가한 딸 집이나
밖에서 아내를 만난다.

이민을 가버린 경우도 있다.

D종금사 전무 E씨는 얼마전 재산을 다 정리해 뉴질랜드로 떠났다.

사정을 설명하자 자녀들도 동의해 함께 비행기를 탔다.

채권청구 소멸시효가 끝나면 들어오겠다는 게 E씨의 고별사였다.

아예 재산을 모두 현찰로 바꾸어 금고에 넣어둔 사람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 부작용 =한 전직 은행 임원은 "경영을 잘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한다"고 토로한다.

부실기업인줄 알면서도 외부의 압력에 밀려 대출을 해 준 경우도 있는데
모두 뒤집어 쓰라는 것은 심하다는 불평이다.

대주주는 놔두고 애꿎은 임원들만 닥달하는 것도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 했는데 이제와서 평생 모은 재산을 내놓으라니
납득이 가겠느냐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부작용도 적지 않다.

금융기관의 현직 임원들 사이에서도 "복지부동"이 횡행한다고 한다.

나중에 말썽이 생길 가능성을 우려해 어지간하면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담보 요구가 더 심해졌다는 기업들도 많다.

최근 빚어지고 있는 금융경생의 원인 중 하나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비단 금융기관들의 얘기만도 아니다.

일반 기업도 소액주주들이 배상을 청구할 경우 임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임원배상 책임보험"이라는 보험상품이 있지만 보험료가 비싸 가입한
임원은 거의 없다.

이번 처럼 예금보험공사 등 외부기관이 청구하는 손해배상은 보험금을
내주는 대상도 아니다.

이러다 보니 "도장 찍기"를 망설일 수 밖에 없다.

"기업의 별"이라는 임원을 피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한다.

"책임경영"이라는 IMF식 논리는 또다른 "불법"을 불러오고 있다.

전직 은행 임원으로 하여금 금융실명제를 위반하게 만드는 풍경은 IMF가
몰고온 새 풍속도다.

< 남궁덕 기자 nkduk@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