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준의 골프백과] 미국 PGA 이야기 (3)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1899년 고무 질로 만든 골프공의 등장으로 구타페르카볼은 종언을
고하면서도 골프계는 20세기를 맞는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윌리 앤더슨(Willie Anderson, 1980~1910)은 1890년대
중반 첫번째로 미국에 건너온 스코틀랜드 프로 골퍼중 일원으로 알렉스
스미스 등과 같은 시기에 미국 투어에서 활약한다.
1901년 US 오픈을 시장으로 1903 1904 1905년 연속 3년 우승을 해 미국
골프역사상 이 대회를 네 번 우승한 4명중(바비 존스, 벤 호건, 잭 니클로스)
첫번째 골퍼가 된다.
1901년 친구이자 동료인 알렉스 스미스를 연장전에서 이기고, 1903년 역시
연장전 끝에 우승을 한다.
1904년 US 오픈은 5타나 여유있게 우승을 한다.
1905년 US 오픈에서는 친구이자 숙적인 알렉스와 다시 난투전을 하지만,
결국 앤더슨의 2타차 승리로 끝난다.
또한, 당시 US 오픈 다음으로 비중이 컸던 웨스턴 오픈을 네 번이나
석권했다.
골프공이나 클럽, 골프장의 조건이 오늘날에 비해 형편없었던 당시 이런
성정을 낼 수 있었던 것들은 그가 얼마나 위대했던 선수였나를 말해준다.
모양새와는 거리가 먼 아주 플래트한 스윙은 왼쪽 팔이 오른쪽 어깨를
휘감을 정도였고, 엉덩이는 자유롭게 움직이난 스윙을 하지만 아주 정확한
샷을 구사하는 선수였다.
특히 5번 아이언과 드라이버샷은 일품이었다.
그러나 그의 최대의 무기는 진지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정신자세였다.
신중하고 과감한 스윙은 한결 같았고, 그의 퍼팅은 어떤 상화에도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과묵한 성격때문에 경기도중에도 결코 말이 없었으나 가끔가다 한마디씩
던지는 유머에 많은 팬과 친구들을 가졌다.
앤더슨은 14년동안 차기 US 오픈이 열릴 예정인 10개의 골프장에 수석프로로
옮겨 다니는데, 이것은 그가 US 오픈 타이틀에 얼마나 많이 집착했다는 말해
준다.
그는 1910년 동맥경화로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기에(그는 세상을 마치는 주에 36홀 매치플레이를 했음),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앤더슨의 친구 말로는 "그는 남들에게 따뜻하게 베푸는 편은 아니었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수많은 파티의 참석이 그의 건강을 점점 악화시켜
결국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고 한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프로골퍼가 돼 골프장 그린 관리자인 아버지를 따라 새
개척지로 온 그는 수많은 대회의 우승으로도 자신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무절제한 파티와 술로 결국 세상을 마치는 불운의 골퍼로 남는다.
그러나 그는 1940년 미국 PGA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1975년에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영예를 갖는다.
< 전 미PGA 피칭프로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0일자 ).
고하면서도 골프계는 20세기를 맞는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윌리 앤더슨(Willie Anderson, 1980~1910)은 1890년대
중반 첫번째로 미국에 건너온 스코틀랜드 프로 골퍼중 일원으로 알렉스
스미스 등과 같은 시기에 미국 투어에서 활약한다.
1901년 US 오픈을 시장으로 1903 1904 1905년 연속 3년 우승을 해 미국
골프역사상 이 대회를 네 번 우승한 4명중(바비 존스, 벤 호건, 잭 니클로스)
첫번째 골퍼가 된다.
1901년 친구이자 동료인 알렉스 스미스를 연장전에서 이기고, 1903년 역시
연장전 끝에 우승을 한다.
1904년 US 오픈은 5타나 여유있게 우승을 한다.
1905년 US 오픈에서는 친구이자 숙적인 알렉스와 다시 난투전을 하지만,
결국 앤더슨의 2타차 승리로 끝난다.
또한, 당시 US 오픈 다음으로 비중이 컸던 웨스턴 오픈을 네 번이나
석권했다.
골프공이나 클럽, 골프장의 조건이 오늘날에 비해 형편없었던 당시 이런
성정을 낼 수 있었던 것들은 그가 얼마나 위대했던 선수였나를 말해준다.
모양새와는 거리가 먼 아주 플래트한 스윙은 왼쪽 팔이 오른쪽 어깨를
휘감을 정도였고, 엉덩이는 자유롭게 움직이난 스윙을 하지만 아주 정확한
샷을 구사하는 선수였다.
특히 5번 아이언과 드라이버샷은 일품이었다.
그러나 그의 최대의 무기는 진지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정신자세였다.
신중하고 과감한 스윙은 한결 같았고, 그의 퍼팅은 어떤 상화에도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과묵한 성격때문에 경기도중에도 결코 말이 없었으나 가끔가다 한마디씩
던지는 유머에 많은 팬과 친구들을 가졌다.
앤더슨은 14년동안 차기 US 오픈이 열릴 예정인 10개의 골프장에 수석프로로
옮겨 다니는데, 이것은 그가 US 오픈 타이틀에 얼마나 많이 집착했다는 말해
준다.
그는 1910년 동맥경화로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기에(그는 세상을 마치는 주에 36홀 매치플레이를 했음),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앤더슨의 친구 말로는 "그는 남들에게 따뜻하게 베푸는 편은 아니었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수많은 파티의 참석이 그의 건강을 점점 악화시켜
결국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고 한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프로골퍼가 돼 골프장 그린 관리자인 아버지를 따라 새
개척지로 온 그는 수많은 대회의 우승으로도 자신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무절제한 파티와 술로 결국 세상을 마치는 불운의 골퍼로 남는다.
그러나 그는 1940년 미국 PGA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1975년에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영예를 갖는다.
< 전 미PGA 피칭프로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