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로부터 "요새는 살기가 재미져야"라는 말을 듣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지 몰랐다.

부친은 10여년 전부터 알 수 없는 병을 끌어안고 사신다.

뇌수 속 미로 어딘가에 석회질이 떠다니고 있다가 과도한 신경을 쓰거나
충격을 받으면 그 석회질이 뇌를 자극해 혼수상태에 이르게 되는 병이다.

신새벽에 부친이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고 기차를 타거나 택시를
불러 타고 정읍으로 내려가기를 몇 해째 계속했는지.

어느 해에는 한 해에 다섯 번도 넘게 병원에 실려가신 적이 있었다.

열흘씩 보름씩 혼수에 드는 부친을 중환자실 바깥에서 지켜보는 일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깊은 시름이었다.

부친이 병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시골에 가는 일이 영 재미가 없어졌다.

내가 기차를 타고 정읍역에 도착하면 역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마중 나오시던
부친.

둘이서 시장에 들러 산낙지도 사고, 어머니께 드릴 신발도 사고, 푹푹 고아
먹을 사골도 사던 작은 기쁨들도 사라졌다.

새벽마다 논으로 나가는 부친을 뒤따르며 앙상해진 그 분을 뒤에서 껴안아도
보고 피도 뽑고 이삭도 줍고 퇴비도 발로 꾹꾹 눌러주던 일도 사라졌다.

소를 기르시던 부친의 우사에 들러 송아지를 밴 소가 길게 하품을 하는
꼴이나 갓 태어난 송아지의 그 하염없는 눈망울을 들여다보는 일도 없어졌다.

감나무의 감도 따지 않고 그대로 두었고 함께 고구마를 캐는 일도, 감자를
심는 일도 없어졌다.

무엇보다 집안의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을 부친께 모두 숨기게 되었다.

부친의 뇌수 속에 떠다닌다는 석회질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그런 중에 부친은 이삼년 전부터 관절 퇴행증이란 병을 하나 더 맞이했다.

날마다 한 줌씩 약을 먹어야 하는 처지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되자 늘
온화함을 잃지 않던 부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런저런 주사나 약, 물리치료가 소용없이 점점 더 악화돼 나중에 부친은
한밤중에 깨어나면 통증 때문에 우는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로부터 "요새는 너그 아버지가 울어야. 고개를 수그리고 운다. 얼매나
아픈지 그냥 운다"는 말씀을 전해들은 날이면 무슨 일을 해도 마음이 안
잡히고 공허하고 매사가 부질없이 느껴지곤 했다.

작년에 부친은 결국 관절 퇴행증 수술을 받으셨고 다시 병원신세를 졌다.

목발을 짚고 퇴원을 해서는 방안에서만 생활했다.

겨우 목발을 짚고 마당이나 왔다갔다 하는 생활이 길게 이어졌다.

생각난 듯이 전화를 드리면 착 가라앉아 있는 부친의 목소리 때문에 전화를
끊고, 그리고 나면 또 마음이 안 잡혀 서성거리곤 했다.

그러던 부친이 두어달 전부터 목소리에 생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말씀이 다리가 많이 나아져서 이제는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의
국악원에도 나가고, 목발없이 논에 나가기도 하고 그러신다는 거였다.

그 무렵에 시골에 들렀더니 전에 없이 어머니가 수줍어하시며 "너그 아버지
가 나 새벽마다 등산 댕기는 길 풀을 다 베어줬지 뭐냐. 새벽이슬 땜새 발새
문다고" 하셨다.

흐뭇하고 즐거워서 자랑하고 싶은 게 역력한 말투였다.

"아버지가?"

"그려, 너그 아버지가. 인자 다리는 다 나았는갑다. 쪼그리고 앉아 그 풀을
다 뜯었으니"

가을이 온 지금 엊그저께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부친이 그러신다.

"요새는 사는 게 참 재미져야"

달리 재미진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걸을 수 있게 되어서 재미지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오토바이 타고 읍내에도 가고 걸어서 논에도 가고 반듯하게 서서
대문에 페인트 칠도 새로 하고 무엇보다 걸어서 어머니가 아침마다 다니는
등산길의 풀을 다 베어줄 수 있으신 것이 재미지신 것이다.

부친은 수화기 저편에서 온화하게 한 말씀 보태신다.

"너도 재미지게 살어라"

부친으로부터 사는 게 재미지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요새
재미지다.

부친의 말씀을 생각하면 벙긋벙긋 웃음이 터지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그 여파로 괜한 전화도 상냥하게 받고 뭐 재미있는 소설 좀 써 볼까 싶은
창작의욕도 솟구친다.

부모로부터 듣는 "요새는 살기가 재미지다"는 그 말씀이 이렇게 큰 힘이 될
줄 몰랐다.

이렇게 행복을 줄 줄도 몰랐다.

누구에게든 다 잘해주고 싶고,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도 다 들어주고 싶은
너그럽고 행복한 기분을 가져다 줄 줄은 정말 몰랐다.

-----------------------------------------------------------------------

<> 필자 약력

=<>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주요 작품:"풍금이 있던 자리" "외딴 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수상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