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분 < 방송 작가 >

"미스샷조차 곧 내 실력이려니..."하고 여기던 순둥이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이런 비기너와 함께 해주는 동반자들이 고맙게 생각될
따름이었는데...

볼이 어느정도 맞기 시작하면서 순둥이는 변해갔다.

미스샷의 원인을 잔디깎는 기계소리와 멀리 확성기 소리탓으로 돌리는데
급급했고 어디에서 배웠는지 뜻대로 안되면 클럽으로 땅을 내려치기도 했다.

하지만 화를 낼수록 볼은 더 안맞았고 급기야 18홀 전부를 씩씩거리거나
우울해하던 심정으로 채우기도 했다.

그날도 그랬다.

경사지에만 가면 연이어 터지는 뒤땅치기에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낙엽위에서의 샷은 러프에서보다 훨씬 가늠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울긋불긋 낙엽사이에 가린 볼을 찾기란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낙엽사이에서 헤매기를 몇홀, 그러다가 문득 반대편 언덕에서
동반자가 볼을 찾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낙엽속에서 동반자는 방금 나와같은 불평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멀리서
바라본 그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개구리는 우물안에 있으면 그 우물이 얼마나 근사한 곳이었는지를 모르는
것일까?

멀리서 바라본 경사지는 빛나는 황금빛 언덕이었고 도저히 짜증을 떠올릴수
없는 풍경이었다.

순간 단풍구경하러 설악산에 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몇시간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도착한 그곳에서, 인파 북적대던 단풍나무
몇그루 밑에서 기뻐하시던 부모님.

그에 비하면 내가 불평만하던 이 단풍나무밑이 얼마나 조용하고 아름다운
공간인가.

어디에선가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볼이 뜻대로 나가지 않는다고 화를 내지 말라고.

화를 내기 이전에 골프를 칠수 있는 자신의 복에 대해서 떠올려보라고.

대한민국에서 이만큼의 잔디와 이만큼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누릴 수 있는 자신의 여건에 대해 감사해보라고.

그러면 제 아무리 볼이 맞지 않아도 골프가 즐거울 수밖에 없다고.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골프를 칠수 있게 해준 건강이 감사하고,
골프장까지 나올 수 있게 허락된 나의 여건과 시간이 감사했다.

그리고 함께 할 동반자들이 있음도 감사하고.

이렇게 고마워할것 투성이인데 어떻게 볼좀 안맞는다고 불평을 할 수
있겠는가.

이 가을, 낙엽밑으로 굴러들어간 볼을 찾는 동작자체가 행복이다.

나 혼자 즐기기에는 너무 아까운...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