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정말 많이 변했다.

용공 조작은 정부와 집권당의 전유물인줄 알았는데 이젠 야당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향해서 그 칼을 휘두르니 말이다.

"없는 사실을 조작하는 것은 공산당의 전형적인 선전선동 수법이자 지리산
빨치산 수법이다"

이건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4일 부산 집회에서 자신을 고문기술자,
정치공작의 명수라고 한 여권의 비난을 거론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날린 독설이다.

정의원은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없는 사실을 조작하는 것"은 공산당만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자를 참칭하면서 "공산당의 마수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고 주장하는 파시스트들도 널리 애용하는 수법이다.

아다시피 스탈린과 김일성은 "어제의 혁명동지"들을 "미제 스파이"와
"파시스트 앞잡이"로 조작해서 잔혹하게 제거했다.

그럼 이승만은 어떤가.

북진통일 대신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사형시키지 않았던가?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용공분자로 조작하고 사형선고까지 한 박정희와
전두환도 빨갱이였나?

박종철씨 고문살해 사건이나 김근태 사건, 납북 어부 김성학 사건에서
명백히 입증된 것처럼 "없는 사실을 조작"하기 위해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참혹한 고문을 자행한 것은 이근안을 비롯한 "열혈 반공주의자"들이
아니었던가?

고문기술자들이 간첩과 반국가 사범을 "제조"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던 시절 자신이 그들을 거느린 수사책임자였다는
사실을 정의원은 벌써 잊어버린 것일까.

온 사회를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복속시키려고 하는 개인과 정치세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법률과 폭력의 힘을 빌어 사상과 견해의 다양성을 말살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조작"하는 전체주의적 언행은 헌법적 보호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예외가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맥락에서 "정의원은 나찌의 게슈타포와 구 소련 KGB나 다름없는 공작
전문가로 그가 한국사회를 활보하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라고 한 국민회의
이영일 대변인의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가 안기부 대공수사 국장으로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만 빼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무한권력을 휘둘렀던 암흑의 80년대를 우리는 아직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대한민국은 헌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다.

헌법 위에 "국민정서"라는 게 있고, "국민정서" 위에는 그보다 더 무서운
"지역정서"가 있으니 말이다.

부산 출신의 국민회의 중진 의원은 정형근 의원을 사법처리하는데 반대한다
는 의견을 당 지도부에 전달했다고 한다.

부산 북.강서(갑)을 지역구로 둔 정의원을 구속하면 전체 부산.경남 주민의
"반디제이(DJ) 정서"에 불을 질러 내년 총선에서 여권이 참패할 것이기 때문
이라 한다.

황당하고 슬픈 일이다.

부산 시민들은 지난달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전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1979년의 부산 마산지역 반독재 민주항쟁 2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를
열었다.

10.26 직전 일어난 부마항쟁을 박정희 유신정권은 "불순분자들의 선동으로
일어난 난동"으로 규정하고 군대를 투입해서 시위를 진압했다.

그런데 바로 그 도시의 유권자들이 지난 총선에서 "정보공작정치의 대가"
정형근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시켰고, 그가 이근안 고문 사건과
관련해서든 이번 발언으로 인해서든 법률적 처벌을 받을 경우 옥중 당선을
시킬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정말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도대체 "부산정서"의 실체는 무엇인가.

김대중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정치인은 고문 범죄 관련자라도 무조건
밀어주는 것이 "부산정서"라면 부마항쟁의 정신을 기리는 민주공원은
철거해야 앞뒤가 맞지 않겠는가.

< 시사평론가. 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