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택선 < 한국외대 교수 / 경제학 >

대우사태가 해결의 가닥을 잡아가면서 금융시장이 안정되는 조짐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정부가 대우문제 해결과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천명하자 주식시장이 회복되고 금리가 안정되는 양상이다.

정책담당자들의 발언을 상기해보자.

지금은 지난 97년말의 위기로부터 비교적 착실히 회복되고 있는 실물부문을
자칫 금융부문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금융시장의 안정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정책목표라는 것.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시장에 드리워진 불안심리를 걷어내야
한다.

따라서 정부가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자금을 풀어서라도 투자자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금리를 낮춰야 한다.

시스템위기의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마당에 정부로서도 정책선택의 폭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을 것이다.

이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최근 정부정책의 흐름에는 몇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먼저 이른바 금융시장의 불안심리라는 것이다.

97년 경제위기 이래 수익증권의 판매가 도입되고 그 규모가 예상외로
커지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직접금융시장에서의 자금조달이 쉬워지게 됐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위험을 줄이고 간접투자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경제위기가 회복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도 일정부분
사실이다.

그러나 직접금융시장에서 완전히 무위험자산은 없다.

이런 사실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상황에서 내재돼 있는 위험이 현실화되면
혼란이 생기고 금융시장이 한꺼번에 불안심리에 휩싸이게 된다.

투자자들은 위험의 정도에 관계없이 투자자금을 회수, 금융시장에서 발을
빼려고 한다.

이 경우 불안심리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동안 근거도 없이 횡행하던 "대마불사"의 논리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심각한 국민 경제적 파장"을 고려한 정책의 관행이다.

"설마 망하기야 하겠어. 망해도 정부가 나서서 어떻게 해 주겠지"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기업과 투자자의 책임 문제를 꺼내기만 하면 시장은
갑자기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경제정책과 관련한 준칙 대 자유재량(rule vs. discretion)의 논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경제상황에 따라 적절한 정책을 강구하도록 한다는 자유재량의 정책논리는
결과적으로 정책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고 경제에 정치논리가 끼여들게 만들
여지가 있다.

정부가 원칙을 정하고 여기에 충실하거나 충실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장기적으로 정책에 대한 신뢰를 쌓아 불안심리를 치유하는 근본대책임을
깨달아야 한다.

인질범은 당국자가 어떤 경우에도 타협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인질극을 벌이지 않지만, 겉으로는 타협하지 않겠다고 하고 늘 협상을 하기
때문에 무언가 얻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인질극을 벌인다는
어느 경제학자의 비유는 되새겨 볼 만하다.

두번째 문제는 정책이 단기대책에 너무 편중돼 있다는 점이다.

금리안정을 위해 계속 통화의 고삐를 늦춘다면 물가가 오를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더구나 중심을 잡고 경제 전반의 안정적 흐름을 체크해야 할 중앙은행까지
나서서 투신사에 대한 유동성지원 대책을 천명하고 있으니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재정적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금융 구조조정과정에서 공적자금을 쏟아부으면서 금년 말에 국가채무는
9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국가채무가 증가하면 재정적자가 커지게 되고 그만큼 장기적으로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 선택의 폭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 그 채무는 누구의 몫인가.

침묵하는 익명의 다수로부터 돈을 거둬 목소리를 내는 소수를 구슬리는
정책은 경제정의의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각종 대책의 현실적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걱정스러운 것은 정부정책이 원칙과 장기적 안목보다는 단기적 현실의
필요성에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정책 대안들 사이에 상충되는 결과가 예상된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대기업의 부도사태에 그 연원을 두고 발생한 97년의 경제위기 이후 너무도
많이 언급돼왔던 원칙, 투명성과 같은 말들을 대우문제를 다루는 정부에
대해 또 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이 행여 총선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안될 일이다.

제대로 된 경제정책은 정치적 입지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 tsroh@san.hufs.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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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일리노이대 경제학 석.박사
<>논문:국제자본이동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