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쇼핑몰 두산타워 2층에서 아동복 가게를 운영하는 김명희(46)씨는
거상중 한 사람이다.

김씨는 동대문 두산타워와 남대문 원아동복에 가게를 두고 있다.

현대 신세계 등 18개 대형 백화점에도 직매장을 열고 있고 전국에 26개의
대리점을 거느리고 있다.

김씨의 대표 브랜드인 "아이사랑"은 일류 백화점에서도 아동복으로는
매출순위 다섯 손가락안에 꼽힐 만큼 탄탄한 명성을 얻고 있다.

김씨가 아동복 장사를 시작한 것은 25년전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그녀는 6년 동안 아동복 바이어로 일하다가 그만두고 남대문 시장에 가게를
차렸다.

그녀는 장사를 시작하면서 자신만의 철칙을 세웠다.

옷을 제대로 만들어 제값을 받자는 것이었다.

물론 옷이 잘 나갈 때는 마구잡이로 만들어 많이 팔고 싶은 유혹도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질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80년대 중반께부터는 남편과 함께 "아이사랑"의 빅 브랜드화를 시도해 큰
성공을 거뒀다.

동대문에서도 김씨만큼 규모가 큰 거상은 흔하진 않다.

하지만 모든 상가에는 크고 작은 거상들이 버티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동대문 패션을 이끌어가는 큰손들이다.

이들은 가게에 산더미처럼 옷을 쌓아놓고 지방상인들을 기다린다.

또 남들보다 서너달 먼저 다음 시즌 옷을 준비한다.

거상중에는 "밀리오레 신화"의 주인공인 성창F&D의 유종환(43) 사장처럼
직접 상가개발에 나선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

거상들은 대부분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일에만 몰두한다.

돈 좀 벌었다고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잘 알지 못하는 분야를 기웃거리지도
않는다.

거상들이 일에 빠지는 것은 무엇보다 일에 재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김명희씨는 "단순히 돈을 벌려고 일하는 상인들은 망하기 쉽다"면서 "일이
좋아 일에 몰두하면 힘든 줄도 모르게 되고 돈이 저절로 따라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대문시장에 젊은이들이 몰려 들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거상들의
입지도 이제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예전과는 달리 요즘엔 큰손 상인이 운영하는 가게라고 무조건 손님이
몰리지 않는다.

디자인과 품질에서 돋보이지 않으면 고객들은 여지없이 외면해 버린다.

실제로 외환위기가 터진 뒤 동대문 거상중 여러명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쓴잔을 마셨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거상의 개념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가게와 공장을 여러개 거느리고 있으면
거상이라고 불렀다.

또 대기업들이 패션산업에 뛰어들면서 상인들은 규모를 키워야 거상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터진후 대기업 계열의 패션업체들이 잇따라 쓰러지자
상인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규모가 작더라도 옷을 잘 만들고 실속 있는 상인이면 거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도매상가인 팀204에서 니트를 파는 박모(40.여)씨도
거상이라고 부를 만하다.

박씨는 밀리오레와 디자이너밸리에도 매장을 갖고 있다.

지방상인 중에는 대리점이나 다름없는 단골고객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규모를 키우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좋은 옷을 만들어 눈길을 끄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박씨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심정으로 옷을 만든다"고 말했다.

동대문 사람들은 거상들이 양보다 질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중요한 변화라고 입을 모은다.

팀204 상가운영위원회의 유광수 위원장은 "세계적 브랜드는 양이 아니라
질로 인정받는다"면서 "동대문 상인들이 외국에서도 인정받으려면 질이 좋은
옷을 만들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 김광현 기자 khkim@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