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벨 뷔페 부인 보십시오.

먼저 갑작스런 뷔페의 사고에 서둘러 조의를 표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만사 제쳐놓고 비통한 마음을 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 줄 알지만,
우리나라도 호프집 사건으로 숨돌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물론 어제 오늘 일도 아니지만.

지난 10월5일 당신 남편의 죽음을 단신으로 보고 저는 한동안 망연자실
했습니다.

그 무너지는 순간에도 저는 베르나르 뷔페를 향해 따지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는 더욱 소스라쳤습니다.

뷔페씨!

당신은 이미 약관 20세에 프랑스 최고 권위를 지닌 비평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것은 작가로서는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잔인한 선을 가진 화가, 후벼내는 듯한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선으로 당신의
명성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고 그래서 사람들은 일제히 당신을 향해
"현대예술의 교주"라고까지 칭송했습니다.

당신의 조국에선 물론 유럽의 화랑가에서 뷔페란 이름은 언제나 샛별처럼
빛났고 프랑스의 미술잡지가 전후의 화가 열사람 선정하는데 1위에 꼽힐
정도로 당신의 인기는 절정에 올랐지요.

그때 당신의 나이는 고작 27세였습니다.

뷔페씨!

당신은 놀랄 만큼 간결하고 날카로운 선과 필치로 시대의 불안을 담아내는가
하면 공포에 대한 거부의 세계를 강렬하게 묘사해 우리를 전율케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신은 고야나 피카소처럼 전쟁에 민감했고 격분했습니다.

당신의 손이 닿으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도 황폐한 들판이 되고 요동치며
격동하는 화풍이 되어 모든 이에게 오래도록 서사적 감동을 안겨다 주었습니
다.

그러나 불행은 언제나 당신이 행복할 때 혀를 내밀고 있는 법일까요.

그때 당신은 이미 몇번 붓질이 지나가면 황금이 되어 돌아오는 마이다스의
손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었겠습니까.

어쩌면 이것이 당신에게 있어 불행의 씨앗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유럽의 돈 많은 성주들이 성그림을 그려달라고 했을 때, 이름난 차동차
회사 사장들이 차그림을 주문할 때 어떻게 당신이 눈앞에 돈을 두고 모든
것을 거절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산작가" "재벌작가"라는 소문 뒤에 끊임없이 뷔페란 이름이 따라 다닐
때 수많은 작품을 전세계로 내다 팔았지요 당신은.

왜 그랬나요.

당신의 부인이 그토록 돈을 좋아하고 원했나요.

아니면 화상이 자꾸 그려달라고 주문을 하던가요.

아니면 가장 돈많은 재벌화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나요.

아나벨은 당신을 향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며
열정있는 사람, 위대한 화가로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식입니까.

당신이 자살을 하다니요.

더구나 "삶에 지쳤다"는 말만 남겨놓고서.

우리가 만나기로 약속한 11월말을 코 앞에 두고 약속을 잊었나요.

당신에게 영광과 부를 가져다준 그 미술평론가들이 죽도록 원망스럽나요.

상을 준 그들이 당신을 왕따로 돌려 놓는 현실에 지쳤나요.

이렇게 역사의 아이러니는 예술가에게도 있군요.

당신은 43세에 퐁피두 대통령이 주는 훈장을 받았지만 정작 프랑스 현대
미술의 보고인 퐁피두 센터에서는 단 한점도 당신의 그림을 사들이지 않았다
니 가슴이 메입니다.

비록 당신은 침묵했지만 부인은 "이렇게 국제적으로 성공한 작가의 전람회에
미술평론가들이 그림조차 보러 오지도 않는다"고 격렬하게 비난했지요.

당신 역시 "비평가들의 욕지거리가 나의 붓을 꺾을 수 없고 이런 우직한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 예술에 대한 프랑스 평론가들의 평가는 너무나 냉혹하고
단호했습니다.

어쩌면 당신을 인정한 평론가들의 기대와 희망을 당신이 부의 축적에
써먹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깊은 배신감을 가졌는지도.

이구동성으로 평론가들이 "베르나르 뷔페는 이미 70년대 이후 끝났으며
이제는 당신의 전시를 볼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리오넬 조스팽 총리가 "전후의 빈곤과 고통을 예리하게 그려낸 작가"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그의 붓놀림과 채색은 우리 마음 속에 영원하다"며
거장의 죽음을 애도했건만 한 예술가의 자살은 여전히 외롭고 쓸쓸합니다.

어떤 화가는 차라리 그렇게 왕따를 놓더라도 그림이나 좀 팔렸으면 좋겠다는
화가친구도 있더군요.

저는 이런 일들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용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미술사가가 그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군요.

안타깝습니다.

부인!

다시 한번 내 슬픔과 함께 국화 한 송이를 뷔페에게 바칩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