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어디를 가도 30대 이상치고 최무룡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내가 파주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실망스러워
이곳에서 출마했다"

그의 별난 주장에 파주사람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낸 것은 물론이다.

그런 유세전략이 주효했는지 최무룡은 88년 13대 총선에서 승리하여 금배지
를 달았다.

그후 10여년간 최무룡은 정가에서는 물론 본업인 영화계에서도 별로 눈에
띄지 않더니 지난 여름 악극 "아리랑" 무대에 나와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올드 팬들을 사로잡았다.

"노병은 아직도 건재하구나"싶었는데 지난주 목요일 71세를 일기로 홀연
이승을 떠났다.

최무룡은 52년 채만식의 "탁류"로 데뷔한 뒤 김진규와 함께 70년대 초까지
한국영화의 중심에 서 있던 은막의 연인이었다.

이제 그마저 떠났으니 우리 영화사의 한 시대가 마감한 느낌이다.

말이 드물고 수줍은 듯한 표정, 그러면서 부드러운 눈매가 매우 인상적인
배우였다.

군인과는 거리가 먼 마스크였지만 그의 대표작을 보면 군복차림이 많았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빨간 마후라" "남과 북"을 통해 그는 육.해.공군
배역을 모두 섭렵했다.

스타로서 대성한 그에게 불행의 싹이 트게 된 계기는 제작에 뛰어든 것.

필생의 사업으로 "나운규의 일생"에 손을 댔다가 크나큰 좌절의 쓰라림을
겪어야 했다.

그의 마지막 무대가 나운규의 "아리랑"이고 보면 춘사와는 인연이 멀었던
모양이다.

최무룡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은 노래솜씨.

고혹적인 눈매에다 가수뺨치는 미성까지 갖췄으니 여성 팬들을 사로잡은
정도는 알 만하다.

TV가 드물던 60~70년대엔 영화와 가요는 대중오락의 전부였기 때문에 청춘
스타로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전후 급격히 확산된 자유연애 풍조에 현혹된 젊은 여성들이 최무룡처럼 잘
생기고 노래 잘하는 남자에 사모의 정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장년기에 접어든 그가 스캔들로 곤욕을 치렀던 것은 기성세대의 보수주의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적인 애정관으로 말한다면 최무룡은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한 연인이었다

그가 간통죄로 몰렸을 때 도하의 신문들은 구속된 남녀배우가 함께 미소짓는
사진을 대형으로 싣고 그 "뻔뻔함"을 나무랐다.

만일 두 사람이 요즘 피의자처럼 쇠고랑을 찬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모습을
보였다면 온당한 행동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불행히도 최무룡은 제작에 손댄 것에 이은 또 다른 외도로 결정타를 맞고
장기 슬럼프에 빠졌다.

5년간 이민생활 등 그의 오랜 방황은 사실상 사생활에 대한 혹독한 인민재판
을 받은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세상을 떠난 뒤에나마 영화인으로서 쌓은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다정다감하고 인간미가 넘쳤던 최무룡의 모습은 이제 낡은 필름에서만 볼
수 있게 된 것이 아쉽다.

그는 연기에 철저했지만 후배사랑이 남다른 것으로도 소문나 있다.

주변사람의 TV회고담을 들어보면 매우 선이 굵은 사나이였다고 한다.

거기에 관념의 벽을 깨고 여성을 용감히 사랑한 애정의 전사같은 풍모가
있었다.

고인의 전성기에 보였던 세인의 사랑과 관심이 그의 사후에도 이어지는
것이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다.

< 편집위원 jsrim@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