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17세기 대륙합리론의 토대를 닦았던 데카르트가 요즘 환생한다면 자기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이 명제를 고집할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나는 누군가 플러그만 뽑으면
사라질 전자덩어리에 불과하다"며 존재에 대한 회의에 빠질지 모를 일이다.

영화 "13층"( The 13th Floor )은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SF스릴러다.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는 한낱 컴퓨터로 만든 가상현실속의 "커서뭉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암울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등장인물의 실존을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최근 개봉됐던 "오픈 유어 아이스"
"매트릭스" "엑시스텐즈"등과 맥을 같이 한다.

말쑥한 차림의 60대 노인 풀러(아민 뮐러 스탈)가 살해된다.

풀러는 1937년의 LA를 모델로 실제와 같이 살아 움직이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을 완성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용의자는 풀러의 오른팔 격으로 회사운영을 떠맡게 된 홀(크랙 비에르코)
이다.

홀은 자신의 옷에 피가 묻어 있는 게 꺼림칙하지만 풀러를 살해한 기억은
없다.

홀은 풀러가 37년의 가상세계에 다녀오곤 했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그
가상세계에 들어가 단서를 찾는다.

영화는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의 세계에 접속한다.

세 세계를 잇는 시간의 흐름은 단선적이지만 과거는 현재, 현재는 미래의
기술문명에 의해 조정되는 한정된 틀속의 허상일 수 있다며 세기말을 사는
현대인의 불안심리를 내비친다.

그렇다고 마냥 진지하고 무겁지만은 않다.

살인을 모티브로 한 추리극 형식에 로맨스도 곁들여 깔끔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독일출신 감독 조셉 러스낙의 데뷔작이다.

< 김재일 기자 kjil@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