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도 뉴밀레니엄 분위기를 타는 것일까.

새 세기의 희망과 지난 세기에 대한 성찰을 담은 시집들이 잇따라 나왔다.

김준태씨의 "지평선에 서서"(문학과지성사)와 이동순씨의 "가시연꽃"
(창작과비평사), 송종찬씨의 "그리운 막차"(실천문학사).

이들 시집에는 역사의 갈피 속에 끼워진 90년대 삶의 모습이 한 페이지씩
그려져 있다.

이들의 시는 묵은 씨앗이 새 싹을 틔우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비춘다.

등단 30주년을 맞은 김준태(51)씨는 이번 시집에 "2000년 밭시"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는 새 시대의 길을 찾기 위해 역사와 시의 "밭"에 새로운 가치와 문화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고 노래한다.

"이제, 어떠한/사상도 이데올로기도/5년을 넘길 수는 없으리라// 밭이
가르쳐주는/침묵의 교훈에 따르면/인간은 늘 새로운 씨앗을 뿌려야 하리라//
밭은 언제나/묵은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썩혀서/그걸로 거름을 삼은 뒤,
새싹을 틔운다"("밀레니엄 2000년 밭시.4" 전문)

시인은 지금 우리가 겪는 아픔과 슬픔을 흙과 열매로 치환시킨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려는 자여/이제 그대는 다시 밭으로 가야 한다"
("다시 밭으로 가야 한다")는 진리를 일깨운다.

이동순(49)씨는 우리 주변의 작은 생명과 사물에서 우주의 큰 그림을
발견한다.

"어둠속에서 점점이 번져가는/불꽃은 아름다웠다/이 신비한 깃털을/우주는
그동안 어디에 감추어놓고 있었던가/나는 지금 우주의 황홀을/슬쩍 꺼내어
보고 있는 것이다"("불티" 부분)

작은 불티 하나에서 "우주의 황홀"과 존재의 근원을 느끼는 것이다.

그에게는 사그랑거리는 빗소리나 개구리 울음 소리, 하찮은 벌레집조차
세상의 밑뿌리로 보인다.

"그 빗소리 사이로/일제히 와글거리기 시작하는 개구리들이/요란하게
들려온다/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태고의 소리를 듣는다"("소리" 부분)

그가 죽은 까치를 묻어주면서 그 부리에 물려 있는 낟알로부터 생명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모습도 미래와 희망의 한 상징이다.

송종찬(33)씨는 1980년대와 2000년대의 중간에 선 90년대 사람들의 고민을
대변한다.

그는 격동의 80년대와 세기말의 90년대 사이에서 의식의 비무장지대, 즉
중간지대를 찾아나선다.

"흐르는 세월 가운데/안전지대를 만들 순 없을까/오가는 추억들이 부딪치지
못하도록/기억 가운데 노란 선을 그을 순 없을까"("중간은 없다" 부분)

민주화 열풍이 휘몰아 치던 80년대를 중간자로 살아온 시인이 익명의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가슴아프다.

"난 오랫동안 이념에 갇혀/떠나는 뱃고동 소리를 듣지 못했고/다시 서정
에 갇혀/울부짖는 그대 목소리를 보지 못했네"("가지 않는 날들을 위해.6"
부분)

그에게 세상의 중심은 "몸"과 "집"이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는 세상 가운데 세워둔/내 집은 무너질 것이다/내 꿈은
나의 중심에 있지 않고/흔들리는 세상 가운데 있을 뿐"("지상의 집" 부분)
이라고 토로한다.

혼돈과 불확정성의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집을 세우려는 의지가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 고두현 기자 kd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