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 방문 ]

타이베이에서 필리핀 마닐라로 향했다.

필자로선 두번째 찾는 마닐라다.

첫번째는 64년 아시아 생산성본부 회의였다.

보여 줄 공장도 별로 없는 필리핀에서 왜 생산성회의를 개최하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첫 방문과 이번 방문에서 느끼고 얻은 것은 적지 않았다.

첫 인상은 필리핀 사람들이 이것저것 자기 자랑하는데 어리둥절했다.

자기나라는 "태평양의 진주(Pearl of the Pacific)"이며 아시아대륙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중추고리라고 자랑했다.

심지어 필리핀대학 의과는 아시아에서 으뜸이라고 떠들었다.

또 아시아에 관한 국제기구는 당연히 필리핀에 본부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민소득은 거의 2백달러.

당시 1백달러수준에서 허덕이고 있는 한국의 처지로서 부럽기만 했다.

필리핀 항공은 우리 일행에게 헬리콥터 비행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지정학적
위치 관계로 세계적 주요 항공노선이 죄다 마닐라에 기착하는 것이 부럽기만
했다.

홍콩 도쿄와의 노선만 겨우 주 2~3회밖에 없는 초라한 한국 항공에 비할
바 아니었다.

67년 방문에서 필자의 관심사는 "아시아 경영원, AMI(Asia Management
Institute)"였다.

설립자는 씨시프(D Scyipe) 회장으로 세계적 규모의 회계법인 소유주였다.

당시 2천여명의 공인회계사 변호사 경영분석가들을 채용하고 있었다.

세계은행이 동남아 중동 등에 제공하는 프로젝트의 타당성 조사는
씨시프회사가 독점하다시피 했다.

씨시프 회장은 화교출신이다.

1백50cm 약간 웃도는 단신으로 중국 등소평을 연상시켰다.

지혜로 똘똘 뭉쳐있는 풍모를 지녔다.

씨시프 회장은 직접 AMI 에 대해 설명했다.

명칭 그대로 필리핀학생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젊은층에 현대경영을
가르치는게 목적이라고 했다.

본인은 교과목, 연간 운영비, 재단 규모 등 구체적인 질문과 더불어
관련자료를 얻었다.

오늘날 전경련의 IMI(국제경영원) 발상은 이 AMI가 촉매제였다.

70년대 초, 씨시프 회장이 동남아 각국에 있는 지사와 인맥을 활용,
"아시아비즈니스 지도자 회의"를 결성해 주도록 필자가 제안했다.

이 회의는 후에 "한.아경제지도자회의(Korea-Asia Business Leaders''
Conference)"라는 이름으로 서울과 동남아 5개국에서 돌아가며 개최하는
회의로 발전했다.

다음 기착지는 태국 방콕이다.

태국과는 당시 이렇다 할 협력구상이 없었다.

다만 태국은 경제개발계획을 막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5개년계획에
지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지금도 기억하지만, 영국식 표현으로 "Board of Trade"라고 칭하는
경제기획원에서 5개년계획 내용, 특히 작성방법 등에 대해 필자가 설명했다.

태국에 와 지정학적 위치로서의 방콕 중요성이 새삼 느껴진다.

한국은 너무나 지구상에서 벽지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지의 불리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싱가포르는 우리 제주도 크기의 작은 나라지만 국부로 일본 다음가는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었다.

싱가포르는 동서교통의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전략적으로 활용,
경제발전의 추진력으로 삼았다.

항만 부두 항공분야에서 세계제일의 효율성을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거국적으로 정보화 사회건설에 매진하고 있으며, 홍콩과는
아시아 금융시장의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67년 우리가 방문했을 때 싱가포르의 개발열기는 대단했다.

경제사절단 15명은 호텔독방을 얻지 못해 홍재선 김용완 회장까지 한방을
같이 써야 했다.

필자도 같이 간 동아일보 이태주 사장과 같은 방을 썼다.

부두도 확충일로에 있었고 아파트건설도 잇따랐다.

싱가포르 시가는 깨끗하고 질서 정연하다.

휴지나 껌을 도로에 버리면 벌금을 내야 했다.

"법과 질서" "자유와 책임"은 리콴유 수상 국가운영방식의 골격이었다.

최근 발간한 그의 자서전에서도, 또 지난 10월 하순 서울 "국제자문단회의"
에서도 리콴유는 이를 거듭 역설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