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아난 < 유엔 사무총장 >

개발도상국들은 항상 시장개방압력에 시달려왔다.

선진국들은 국제무역이 자유화되면 개도국들도 큰 득을 볼 것이라며
개도국의 시장개방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때문에 개도국은 희생과 비용을 감수하고 시장을 열었다.

일부 최빈국의 경우 무역자유화 이행비용이 한해 국가예산보다 많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개도국들은 지금 자유무역의 결과에 실망하고 있다.

이는 자유무역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다.

개도국으로서는 자유무역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의 다자간 무역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에서 개도국들은 선진국들의
요구대로 관세를 크게 낮췄다.

개도국 중 대부분은 자국 산업의 보호를 위해 여전히 높은 관세장벽을
원하고 있다.

높은 관세장벽을 통해 자유경쟁과 외국상품의 수입을 억제, 자국의 취약한
산업을 지키려는게 그 목적이다.

개도국들은 후에 선진국이 자신들보다 관세를 덜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많은 개도국들이 속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선진 산업국들은 서로 공산품을 자유롭게 수출하면서 만족해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은 개도국으로부터 완제품이 아닌 1차상품등 원자재만
수입하길 원하고 있다.

현재 선진국들이 개도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상품에 부과하는 평균 관세는
다른 선진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에 매기는 관세의 4배나 된다.

또 제3세계 국가들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섬유와 농산물의 수입을 제한하기
위해 교묘한 보호주의 장치들을 마련해 놓고 있다.

수시로 반덤핑혐의로 개도국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세계시장에서 잉여농산물을 저가로 덤핑수출하는 나라는
대부분 선진국들이다.

선진국들은 매년 2천5백억달러에 달하는 농업보조금을 받아 생산한
잉여농산물을 마구 수출,수백만명의 개도국 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자유무역을 주창하는 선진국들의 목소리가 실제로는 "위장된
보호주의"라고 개도국들이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선진국들은 자유무역을 내세우면서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다.

이에 대해 개도국들은 세계화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있다.

일자리 인권 어린이노동 환경 과학 및 의료연구의 상업화등은 인류전체를
위해 신중하게 검토되고 다뤄져야 한다.

특히 세계는 절망적인 빈곤에서 허덕이고 있는 저개발국 국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세계화를 국내정책 실패의 책임을 전가하는 수단이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선진국들은 빈국의 희생을 통해 당면한 문제를 풀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는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무역과 투자는 경제발전을 가져온다.

이와함께 인권과 환경보호를 위한 보다 높은 수준의 국제규범이 나오도록
한다.

물론 이러한 것은 각국이 올바른 정책과 제도를 채택해야 가능해진다.

현재 세계무역을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구속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이슈들을 즉각적으로 풀어나가려는 각국의 의지와 결단력이다.

경제적 권리와 사회적 책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올초 유엔이 국제인권 및 노동기준을 준수하고 환경보호를 추구하는
"글로벌 콤팩트"의 기구 창설을 제안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무역을 통한 세계화가 진정 개도국들에 이득이 되는 것임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이에 대한 반발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개도국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에도 불행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무역확대는 그 가치와 효과면에서 단순한 원조보다 훨씬 더 낫다.

만약 선진공업국들이 보다 많은 시장을 개방한다면 개도국들은 매년 수출을
수십억달러씩 더 할 수 있다.

이는 매년 개도국들이 원조로 받는 금액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선진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미미한 금액이다.

관세를 포함해 개도국 상품에 대한 각종 제한조치들은 크게 축소돼야 한다.

특히 극빈국들의 상품에 대해서는 관세나 쿼터가 완전히 철폐돼야 한다.

이와함께 선진국들은 협상과정에서나 합의된 내용을 통해 개도국들이
실제로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개도국들에 기술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오늘날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환경이 달라졌다.

지구촌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정보통신과 인터넷의 발달은 국경의
개념을 허물어 버렸다.

변화된 환경속에서 우리는 선진국과 개도국간 힘과 부의 불균형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세계는, 특히 선진국은 자유무역을 너무 일방적으로 강요해서는 안된다.

진정으로 인류에 도움이 되는 글로벌 가치와 효과적인 제도에 의한
글로벌자유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 정리=김재창 기자 charm@ked.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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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이 30일 세계무역기구(WTO) 총회에서
행한 기조연설을 정리한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