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이번에도 예산안의 법정 처리시한인 2일까지 새해 예산안을 의결하지
못했다.

현행 헌법은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예산안을 의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에 "의결해야 한다"는 의무규정을 둔 점을 감안하면 국회가 이날까지
예산안을 처리하지 못한 것은 명백하게 헌법을 어긴 것이다.

그러나 정작 헌법을 지켜야 할 국회는 이 조항에 무관심하다.

법정기한은 상징적일 뿐이며 기한내에 처리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다는게
의원들 생각이다.

정부의 상황 인식도 별 차이가 없다.

국무위원들 중 법정기한내에 예산안을 처리해 달라고 국회에 강력히 촉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달 중순까지만 처리되면 별 탈이 없을 것"이라고
한가롭게 말하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법정기한"이란게 국회나 행정부 당사자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조항이 과연 무의미한가.

헌법에까지 이를 규정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예산안이 통과되더라도 당장 내년 1월부터 사업을 제대로 집행하려면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총액사업의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 예산을 집행할 지를 결정해야
한다.

신규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입찰, 사업자 선정 등 준비절차가 요구된다.

국회에서의 예산 처리가 지연될수록 사업이 늦춰지고 부실하게 집행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정부나 국회가 이처럼 법을 무시하는 건 예산안 처리지연으로 인한 부작용에
둔감한 탓도 있지만 "관행"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65년 이후 법정기한을 넘긴 건 올해를 포함해 12차례나 된다.

열흘 이상 늦은게 보통이어서 중순께만 통과돼도 성공적이란 말이 나올 만도
하다.

그렇다고 이 때까지 통과되리란 보장이 없다.

특히 이번 국회는 정치현안이 산적해있어 내년 예산이 언제 의결될 지 극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국회 예결위는 여야 갈등으로 아직까지 계수조정 작업에 착수하지도 못했고
선거구제 문제를 둘러싼 협상이 난항을 겪을 경우 예산안이 "인질"로 잡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천년을 맞이하는 첫해 예산이라며 잔뜩 의미를 부여했던 정치권은 이
예산안을 처리하면서도 여전히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법을 집행하는 정부와 법을 만드는 국회가 법을 지키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지킬 의지조차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 김남국 정치부 기자 nkkim@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