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 < 중앙대 경제학 교수 >

IMF 위기는 큰 시련이었다.

우리는 많은 고통을 대가로 지불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 시기를 한국 경제의 선진화를 앞당긴 자산항목에 기록
하게 될 것이다.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은 역동적이고 압축적이라는데 특징이 있다.

발전과정이 그만큼 단층적이고 비연속적이라는 뜻이다.

IMF 위기는 경제발전 과정상의 모순과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이를 치유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시켰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구조적 문제점을 압축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었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따른 고통 또한 충격적인 것이다.

그러면 IMF 위기는 왜 온 것인가.

90년대 들어서 발전환경의 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발전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그 변화는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다.

이러한 환경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데서 경제위기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IMF 위기는 적응 위기였다.

그리고 그 변화는 공산권의 붕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와 경제성장의 성공
으로 이제 인력부족 시대에 들어섰다는 국내환경의 변화, 두가지 요인이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다.

먼저 공산권이 무너지고 세계가 시장경제권으로 통합되면서 보호질서는
개방질서로 이행하게 되었다.

개방질서는 사람과 지역은 차별하지 않고 능력을 차별하는 질서다.

어느 나라 제품이든 또는 어떤 사람이든 경쟁시장에서 차별하지 않으며
다만 능력에 따라 적자생존의 냉혹한 차별화가 이루어지는 체제다.

한국 경제는 여기에 적응할 수 없었다.

우리는 사람과 지역을 차별한 반면 능력은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혈연 지연 학연 등 연고주의 질서에 의해, 그리고 산업보호에 의해 사람과
지역을 차별했다.

또 보호정책으로 경쟁력이 없는 기업도 살아 남고 능력이 없어도 학연과
지연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다.

도 자본 개방시대에 보호주의 방식으로 외환을 관리하다가 IMF에 구제금융
을 호소하게 됐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정부도 새 질서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IMF 사태는 보호지역의 붕괴였으며 연고주의에 의한 아시아적 가치관의
패배란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대내적으로는 압축적 성장의 성공으로 인력부족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이 때문에 성장위기와 생활위기를 불러 오게 된 것이다.

압축성장이란 필요한 과정과 절차를 생략하는 성장방식인데 여기서 오는
모순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성장위기란 고임금 시대를 열어 고용 증대에 의한 성장, 저임 경영에 의한
성장, 차입에 의한 성장이 더이상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말하며 생활위기란
의식주의 기본 수요시대에서 환경 교통 교육 사회복지 등 삶의 질 시대로
이행하였음을 뜻한다.

의식주는 경제만 성장하면 해결되지만 삶의 질을 결정하는 사회공공재는
경제성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의식개혁과 사회저축의 증대를 통한 사회공동체적 접근방법이 있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과제다.

한국 경제가 지난 두 해 동안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경험한 것도 이 때문
이다.

IMF체제 이후 기업 도산과 실직이 줄을 이었다.

1만달러 소득은 한해 사이에 6천8백달러로 주저앉았다.

국가 신용은 추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우리는 각고의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면서 새로운 생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해 왔다.

그런지 2년.

우리는 새로 태어나는 기쁨을 맞고 있다.

대우사태 등 위기의 여진은 아직 남아 있지만 그런 속에서 올해 우리는
9%대의 성장을 이룩했다.

7백억달러에 달하는 외환을 쌓았다.

국가 신용도 다시 회복되고 있다.

또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용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 재벌구조도 개혁해야 한다는 점, 일터가
소중하다는 것, 임금이 해마다 15%씩 오른다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제 욕구도 줄여야 한다는 것.

이러한 자각은 매우 소중한 자산이다.

이러한 구조조정과 자각노력은 앞으로도 지속돼야 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당면한 위기가 지난날 수없이 겪었던 위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인가.

과거의 위기는 물질 쪽, 다시 말해 경제 쪽만 고치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생존환경의 판이 바뀌었기 때문에 물질보다도 정신개혁이
앞서야 한다.

연고주의 가치관의 탈피, 개인재산보다 사회재산 축적, 지역주의 탈피,
사회질서와 환경질서의 존중, 교육문화의 개혁, 생활의 합리화 개혁, 그리고
특히 비생산적인 후진적 정치문화의 혁신 등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한국 경제의 선진화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