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간의 선거구제 협상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얼마 전까지 국민회의는 한 선거구에서 세 사람을 뽑는 중선거구제에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결합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만년 3등" 자민련의 독자 생존을 보장함으로써 공동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현행 소선거구제 유지를 확고한 당론으로 견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반대 때문에 여당이 이것을 밀어붙이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지난주 국민회의 박상천 원내총무는 현행 소선거구제에다
"1인 2투표제"에 입각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결합하되 "이중 입후보"를
허용하는 절충안을 전격적으로 제시했다.

국민회의 안에 따르면 유권자들은 지역구 후보에 한 번, 그리고 지지하는
정당에 또 한 번 기표를 한다.

지역구에서는 최다득표자 한 사람만 당선되고 각 당은 8개 권역별로
정당지지표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나누어 받는다.

그리고 후보자는 지역구와 정당명부 양쪽에 동시출마할 수 있다.

여당이 무언가 제안을 하면 무조건 거부 의사를 보이곤 했던 한나라당도
이번만큼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도 매력을 느낄만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중권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구의 어느 지역구에서 출마할 경우
그는 동시에 그 지역 정당명부 후보로도 등록해 둔다.

지역구에서 당선되면 좋고 낙선해도 비례대표 의석을 받아 국회의원이 된다.

한나라당 정치인이 호남에서 출마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여야가 이 제도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중 입후보"를 허용할 경우 각각 "적지"출신 거물급 인사를 손쉽게 영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인 2투표제" 도입 여부,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의 비율, 선거구 조정 등
여러 가지 이견과 쟁점이 있기는 하겠지만 여야 모두 전국적으로 의석을
확보하기에 유리한 면이 있기 때문에 이전의 어떤 방안보다도 합의처리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중 입후보" 제도는 오.남용을 하지만 않는다면 매우 합리적인 제도이다.

국회의원은 특정 선거구에서 뽑히지만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다.

원칙적으로 지역구 주민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국회의원은 때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소속 정당의 당론과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지역구 주민의 뜻에 어긋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소속 정당에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지만 지역구에서는 인기가 없는 정치인
도 있다.

"이중 입후보"를 허용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정당정치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국민회의의 절충안을 정치개혁 입법으로 인정해 주기는 어렵다.

"1인 2투표제"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그리고 "이중입후보 제도"는
모두 독일 선거법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제도만은 빌려오지 않았다.

국회 의석을 유권자의 정당지지도 비율에 따라 정확하게 나누어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독일은 연방의회와 지방의회를 가리지 않고 이 제도를 적용한다.

각당이 받은 정당지지도에 따라 우선 의석 수를 결정하고 거기에서 지역구
당선자 수를 뺀 만큼 권역별로 비례대표 의석을 할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회의 의석구조는 유권자의 정당지지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민주주의 기본원리을 외면하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다.

여러가지 제도적 개선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권의 절충안에서 국민의
뜻을 존중하려는 자세를 읽어내기는 어렵다.

야당의 합의를 이끌어낸다 해도 충분한 토론을 거쳐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에 이런 선거제도가 오래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이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시사평론가/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