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개발도상국의 미래에 심대하고도 장구한
영향을 미칠 국제회의들이 잇따라 열린 한 주였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3(한국, 중국, 일본)으로 통칭되는 동아시아 13개국
정상회담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이른바 뉴라운드의 시발점이 될 WTO각료회담
이 미국 시애틀에서 열렸다.

중국 베이징에서는 오존층 보호를 위한 몬트리올 의정서 제11차 당사국
회의가 개최됐고, 스웨덴 예테보리에서는 유엔유럽경제위원회 주관 아래
유럽북미 27개국 환경당국자간 4대 오염물질 감축 의정서 서명식이 있었다.

이런 굵직한 국제회의가 아니더라도 오늘날은 세계 어느 구석에서 어떤
국제회의가 진행되고 있는지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국제회의가 하루도
쉼 없이 이어지고 있다.

각 산업분야 주요 업체들끼리의 기술표준에 대한 실무협의에서부터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와 그 산하 위원회들의 분과협의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주로 선진국이 주도하는 이 모든 국제회의의 흐름이 우리에겐 매우
불길한 앞날을 예고한다.

이들이 현재 짜 나가고 있는 국제규범이 많은 경우 지대(임대료) 추구형이기
때문이다.

종래의 무역관련 국제규범은 단순히 교역상품이나 서비스의 거래량과 가격에
영향을 주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누구든 국제교역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해서는 노동력과 자본을 들여 제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해 제공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 시애틀 WTO각료회담에서 쟁점이었던 환경과 노동관련 규범을
비롯해 그 훨씬 이전부터 추진돼 온 새로운 국제규범들은 성격이 매우 다르다

이미 한번 이룩된 성과에 대해 거의 반영구적으로 편하게 앉아서 이윤을
챙기는 내용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가장 전형적인 것이 환경에 관한 각종 국제협약이다.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의 유엔인간환경선언을 시발점으로 기후변화협약
생물다양성협약 비엔나협약 바젤협약 해양오염방지협약 등 환경과 관련해
체결된 국제협약만 27년 사이 벌써 210개나 된다.

한국이 가입한 것도 40개나 된다.

이같은 협약은 최근들어 갈수록 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이들의 내용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기술력이 떨어지는 개도국의 생산활동을
원천봉쇄 하거나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후진국이 이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을 선진국으로부터 이전받을
경우 그 모든 결과물에 대해 사용료를 내는 것을 원칙으로 채택하고 있다.

유전자원의 경우 그 모태가 되는 원천국가의 권한보다는 이를 조금이라도
변형시킨 선진국의 권한만 강조되고 있다.

최근 국제경제질서를 재편하고 있는 국제규범의 또 다른 특성은 정해진
한도가 없다는 것이다.

한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국제규범을 주도하는 선진국의 자체 기술수준일
뿐이다.

어떤 문제가 있어 규범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규범을 정할 수 있는
기술력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문제로 지목되고 규범이 강화
되고 있다.

유럽이 최근 미국의 항공기에 대해 소음공해를 이유로 취항을 금지시키려
했던 것이나 유럽연합이 자국내 자동차제조업체들에게 이산화탄소 배출기준을
강화해 적용하면서 이를 자율규제형식으로 한국과 일본에 강요한 것이 다
이런 성질의 것이다.

한국이 현재상황에서 이런 모든 것을 극복할만한 실력은 별로 없다.

우선 기술력이 떨어지고 경제발전을 대외무역에 의존하고 있다는 등 약점이
너무 많다.

농업도 우리의 치명적 약점 가운데 하나다.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으로서는 한국의 농업개방으로부터 얻는 이득이
크지 않지만 우리로서는 잃을 것이 많다.

그래서 선진국의 요구에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부담을 덜기 위해 다자간 협상 석상으로 환경문제 등을 끌고 갈
수도 없다.

한국은 선진국에 가까운 것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앞으로 갈수록 더 이번 동아시아 13개 정상회담에서
필리핀의 조세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제안한 동아시아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아시아국가들끼리의 산업연관표를 작성함으로
써 과연 아시아의 홀로 서기가 가능한 것인지 가늠해보고자 노력할 것이다.

< 경영학박사 / 전문위원 shindw@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