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저널] '볼커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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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고 있는가.
옷로비, 조폐공사 파업유도, 서경원 밀입북사건과 관련된 수사를 지켜보는
해외의 시선은 착잡하다.
가시권에 들어 온 이들 사례가 산더미같아 보이지만, 결국 이들도 빙산의
일각일 뿐 우리사회 깊은 어두운 곳에 갇혀 있는 크고 작은 진실들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유추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초 나치에 학살된 유대인들이 소유했던 스위스은행
계좌 실태를 조사 발표한 이른바 "볼커 보고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나치당은 6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스위스은행에 계좌를 갖고 있었고 결국
"주인잃은 눈먼 돈"으로 남게 됐다.
계좌의 실존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정적 증빙서류를 제시하지 못하는 유가족
들은 발만 동동 굴러야했다.
유대인들의 원성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유대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쥐고 있는 미국 쪽에서의 문제제기는
매우 거센 것이었다.
미 의회는 관련된 스위스은행들이 "주인없는 계좌"를 낱낱이 밝힐 것을
의무화하는 법을 통과시켰을(1962년) 뿐 아니라 유가족들의 문의와 고정을
처리해주는 상설기구까지 창설됐다.
이같은 미국거주 유대인들의 거센 집단반발에 굴복, 스위스 은행들은 결국
95년 9월 나치학살과 관련된 얼굴없는 계좌들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스위스의 고해성사는 철저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치희생자들의 계좌수가 극히 미미한 숫자(7백75계좌)일 뿐 아니라 그
금액 또한 3천2백만달러에 불과하다는 것이 미의회에 나온 스위스은행들의
증언이었다.
급기야 96년 폴 볼커 전 미 FRB의장을 의장으로 하는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조사위원회의 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지 2개월만에 스위스 은행들은
"주인잃은 유대인계좌"가 2천계좌 (4천만 달러 상당)에 달한다고 그 숫자를
늘려 발표했다.
종전 7백55계좌에서 1천2백여 계좌가 늘어났다는 진일보한 고백이었지만
이를 수긍하는 유대인들은 없었다.
항의는 계속됐다.
진화에 실패한 스위스은행들은 3개월 뒤 또 다른 3천7백계좌를 새로
발견했다고 발표하는 궁색한 모습을 연출했다.
결국 스위스은행들과 유대인들은 97년 10월 뉴욕지방법원에서 맞서야 했다.
더 참지 못한 유가족들이 스위스은행들을 상대로 4백억달러에 달하는
집단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볼커위원회의 계좌추적은 3년간 계속됐다.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고 누군가의 주머니속에서 잠잘 뻔하던 계좌수가
무려 5만4천개에 이른다는 놀라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스위스당국의 발표에선 천 단위에 머물던 숫자가 만 단위로 불어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스위스은행들이 그간 쌓아 온 과거의 명성에 대한 손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조직적으로 자료를 파괴하거나 진실을 은폐한 증거는 없다"는 볼커보고서의
결론에서 다소의 위안을 찾고 있는 것이 스위스의 표정이다.
빠져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탈출구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스위스은행들이 유가족들의 문의에 "성실하게 답하려는 노력
(lack of diligence)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게
볼커보고서의 입장이다.
1백% 면죄부를 줄 수 없다는 설명이다.
러시아에 살던 한 유대인이 1930년 개설한 스위스은행의 한 계좌는 1962년
기준으로 그 가치가 1백만 스위스 프랑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은행의 경우, 원금에서 발생한 이자를 떼어내(cream off) 신규계좌
가 개설된 것처럼 꾸며진 것도 있었다는 것이 볼커보고서의 지적이다.
볼커보고서를 지난 3년간의 조사결과로 국한시키지 않고 종전 이후 시작된
유대인들의 "50년 투쟁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조사위원회가 3년간 쓴 경비만 2억달러가 넘는다.
지루하게 계속되는 옷로비사건이 나라를 망친다고들 하지만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 그 자체와 그로부터 얻는 역사적 교훈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 워싱턴 특파원 양봉진 bjn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9일자 ).
옷로비, 조폐공사 파업유도, 서경원 밀입북사건과 관련된 수사를 지켜보는
해외의 시선은 착잡하다.
가시권에 들어 온 이들 사례가 산더미같아 보이지만, 결국 이들도 빙산의
일각일 뿐 우리사회 깊은 어두운 곳에 갇혀 있는 크고 작은 진실들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유추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초 나치에 학살된 유대인들이 소유했던 스위스은행
계좌 실태를 조사 발표한 이른바 "볼커 보고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나치당은 6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스위스은행에 계좌를 갖고 있었고 결국
"주인잃은 눈먼 돈"으로 남게 됐다.
계좌의 실존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정적 증빙서류를 제시하지 못하는 유가족
들은 발만 동동 굴러야했다.
유대인들의 원성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유대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쥐고 있는 미국 쪽에서의 문제제기는
매우 거센 것이었다.
미 의회는 관련된 스위스은행들이 "주인없는 계좌"를 낱낱이 밝힐 것을
의무화하는 법을 통과시켰을(1962년) 뿐 아니라 유가족들의 문의와 고정을
처리해주는 상설기구까지 창설됐다.
이같은 미국거주 유대인들의 거센 집단반발에 굴복, 스위스 은행들은 결국
95년 9월 나치학살과 관련된 얼굴없는 계좌들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스위스의 고해성사는 철저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치희생자들의 계좌수가 극히 미미한 숫자(7백75계좌)일 뿐 아니라 그
금액 또한 3천2백만달러에 불과하다는 것이 미의회에 나온 스위스은행들의
증언이었다.
급기야 96년 폴 볼커 전 미 FRB의장을 의장으로 하는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조사위원회의 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지 2개월만에 스위스 은행들은
"주인잃은 유대인계좌"가 2천계좌 (4천만 달러 상당)에 달한다고 그 숫자를
늘려 발표했다.
종전 7백55계좌에서 1천2백여 계좌가 늘어났다는 진일보한 고백이었지만
이를 수긍하는 유대인들은 없었다.
항의는 계속됐다.
진화에 실패한 스위스은행들은 3개월 뒤 또 다른 3천7백계좌를 새로
발견했다고 발표하는 궁색한 모습을 연출했다.
결국 스위스은행들과 유대인들은 97년 10월 뉴욕지방법원에서 맞서야 했다.
더 참지 못한 유가족들이 스위스은행들을 상대로 4백억달러에 달하는
집단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볼커위원회의 계좌추적은 3년간 계속됐다.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고 누군가의 주머니속에서 잠잘 뻔하던 계좌수가
무려 5만4천개에 이른다는 놀라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스위스당국의 발표에선 천 단위에 머물던 숫자가 만 단위로 불어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스위스은행들이 그간 쌓아 온 과거의 명성에 대한 손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조직적으로 자료를 파괴하거나 진실을 은폐한 증거는 없다"는 볼커보고서의
결론에서 다소의 위안을 찾고 있는 것이 스위스의 표정이다.
빠져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탈출구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스위스은행들이 유가족들의 문의에 "성실하게 답하려는 노력
(lack of diligence)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게
볼커보고서의 입장이다.
1백% 면죄부를 줄 수 없다는 설명이다.
러시아에 살던 한 유대인이 1930년 개설한 스위스은행의 한 계좌는 1962년
기준으로 그 가치가 1백만 스위스 프랑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은행의 경우, 원금에서 발생한 이자를 떼어내(cream off) 신규계좌
가 개설된 것처럼 꾸며진 것도 있었다는 것이 볼커보고서의 지적이다.
볼커보고서를 지난 3년간의 조사결과로 국한시키지 않고 종전 이후 시작된
유대인들의 "50년 투쟁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조사위원회가 3년간 쓴 경비만 2억달러가 넘는다.
지루하게 계속되는 옷로비사건이 나라를 망친다고들 하지만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 그 자체와 그로부터 얻는 역사적 교훈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 워싱턴 특파원 양봉진 bjn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