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국제금융체제는 두가지 방향으로 변화돼 왔다.

하나는 경제활동의 중심이 금에서 달러로 바뀐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정환율
제도가 붕괴되고 변동환율제도가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19세기초 영국에서 처음 시행된 금본위제는 1930년대까지 지속됐다.

금본위제는 금과 통화간의 교환비율(고정환율)을 정한후 한 국가의
금보유량에 상당하는 만큼의 통화만 발행, 유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금본위제는 많은 문제점들을
노출했다.

1차대전 당시 세계 각국은 전비마련을 위해 통화를 무더기로 찍어냈고 이는
물가불안을 야기했다.

금보유량에 비해 통화량이 너무 많아지자 각국은 환율인상(평가절하)경쟁을
벌였다.

특히 지난 29년 몰아닥친 대공황은 금본위제 붕괴의 서막이었다.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각국이 경쟁적으로 통화가치를 끌어내리자
국제통화체제는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31년 영국을 필두로 금본위제를 포기하는 나라가 줄을 이었다.

자국통화를 평가절하하면서 금태환을 정지했다.

2차대전후 새로운 국제통화체제는 이같은 전전의 실패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했다.

2차대전 말기인 44년7월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44개 연합국
대표들이 모여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창설에 합의했다.

브레튼우즈체제가 출범한 것이다.

브레튼우즈체제는 달러를 중심으로 고정환율제였다.

미국은 금 1온스당 35달러의 교환비율을 유지하고 여타국가들은 자국통화와
미국 달러화간의 교환비율(환율)을 고정했다.

환율인상 경쟁을 피하는 한편 물가등 거시경제의 안정을 꾀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여전히 달러가 태환화폐였기 때문에 "금본위제"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60년대와 70년대초 국가간 자본이동이 크게 늘어나면서 브레튼우즈체제는
도전에 직면했다.

미국 영국등에서 잇달아 국제수지 위기가 발생하고 투기적 자본거래가
극성을 부렸다.

미국의 태환능력도 의심받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 닉슨 행정부는 71년8월15일 금과 달러의 교환을 정지시켰다.

"브레튼우즈체제"의 종언이었다.

그해 12월 워싱턴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열린 선진10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총재 회의에서 환율을 새로운 수준으로 고정시켰다.

국제통화질서가 브레튼우즈체제에서 스미소니언체제로 넘어갔다.

그러나 72년6월의 영국 파운드화 위기와 이듬해 달러 불안등으로 스미소니언
체제의 고정환율도 더 이상 지속되기가 어려워 졌다.

수차례에 걸쳐 외환시장이 폐쇄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영국 프랑스등은
서둘러 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

76년1월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IMF이사국이 모여 IMF협정문을 개정,
변동환율제를 공식 인정했다.

킹스턴체제가 들어서면서 변동환율제가 도입됐다.

85년9월 미국등 선진5개국의 플라자합의는 외환거래 뿐아니라 무역이나
산업구조, 국제투자 움직임등 세계경제에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합의는 한마디로 엔이나 마르크화에 대한 달러가치를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이 합의로 엔과 마르크화에 대한 달러가치는 각각 달러당 2백40엔선에서
1백60엔대로, 달러당 2.5마르크대에서 1.7마르크대로 떨어졌다.

미국 레이건정부의 고금리와 달러강세로 인한 미국경제부실과 그에따른
세계경제의 혼란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87년2월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열린 선진7개국(G7)회의에서는 환율변동대를
설정, 과도한 통화가치 변동을 억제하는 루브르 합의가 도출됐다.

이후 시장의 힘에 의해 환율이 결정되는 자유변동환율제를 근간으로 하는
국제금융체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에 자본이득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핫머니 세력이 득세하면서 여러
차례의 외환위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문에 핫머니의 대표인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안이 국제사회에서 나오기도
했다.

새천년에도 지금의 변동환율제가 지속될지, 아니면 다시 고정환율제나
환율변동폭을 제한하는 준고정환율제로 바뀔지는 알수 없다.

< 박영태 기자 pyt@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