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하다,
병 없이는 심심하다.
병 끝에 까마귀 우짖는 들판이 온다 하여도
하얗게 널려 있는 나날,
무슨 핑계로
이 짐을 끌고 가랴.

조재훈(1937~) 시집 "물로 또는 불로"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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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다/병 없이는 심심하다"는 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역설일
터이지만, 상식에 어긋나는 이 발언이 시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하얗게 널려 있는 이 나날들을 병 없이 무슨 핑계로 끌고 가겠느냐는 것이
시의 대강이겠는데, 전체적으로 인생은 고해라는 통설을 정서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얗게 널려 있는"에는 "허구하게 많은" 혹은 "지루한"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읽어도 좋을 것이다.

신경림 시인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