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가르쳐주어도 모르는 사람들..이계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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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민 < 본사 논설위원 >
때가 때인 만큼 요즈음 가장 많이 거론되는 단어가 "새 해" "21세기"
"새 천년"이다.
제법 들떠 있는 분위기도 엿보인다.
그런데 새 해, 새 천년이 시작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편의상 구분해 놓은 시대의 명칭 이외에 당장 크게
달라지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요란스러운가.
의미를 찾자면 지난 천년과 20세기, 그리고 짧게는 지난 한 해를 되돌아
보면서 그동안의 잘못을 반성하고, 그 바탕 위에서 풍요롭고 희망찬 새 날을
일궈보기 위한 결의를 새롭게 해보자는 뜻일게다.
신문 방송 등 모든 매스컴에서 국가발전전략에서부터 우리사회의 잘못된
관행까지를 대상으로 "이런 것은 버리고 가자"는 캠페인이 러시를 이루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캠페인이 공연한 호들갑으로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사회의 상부구조를 형성하는 정치권의 요즈음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호들갑"이 아니라 "부질없는 헛소리"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의 대표들이 모였다는 "민의의 전당" 국회가 그동안 해놓은 일이
무엇인가.
지금 당장 기억나는 것은 여야간 당리당략을 앞세운 정쟁들뿐이다.
호피무늬 반코트를 소재로 한 옷로비, 언론문건을 둘러싼 공방, 그리고
최근엔 저질 발언사건 등등으로 밤낮을 지새고 있는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물론 부정부패의 근절과 정치권력의 도덕성 정립등을 위해 진실규명은
필요하다고 보지만 이젠 그같은 문제들이 춥고 배고픈 서민들에겐 한낱
사치스런 코미디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주고있다는 사실도 조금은 배려해야
할 시점이 됐다.
"제발 이제 그만..."하는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것을 결코 가볍게
보아넘겨선 안될 것이다.
그래도 새해 예산안 처리며, 각종 법안심의도 하지않았느냐는 반론도 없지는
않을 것같다.
과연 그런가.
본연의 임무인 입법활동을 보자.
수많은 민생관련 법안과 개혁법안들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고, 이해집단간의
의견대립이 있는 골치아픈 법안들은 심의자체를 기피하는 낌새도 없지않다.
또 일부 법안들은 특정집단의 이익만을 고려해 개악했다는 평가가 나와
대통령의 거부권행사가 거론되고 있는 판국이다.
국회활동에 대해 아무리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것이 요즘
분위기다.
이례적으로 연말 임시국회를 소집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가당찮은 정쟁으로
또 공전시키고 있으니 한심하기 이를데 없다.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는 비난도 나온다.
금세기 마지막 국회라는 의미를 부여한다면 더욱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요즈음의 정치판을 보면 정쟁을 지양하고 정책정당으로 거듭나기를 주문하는
것 자체가 학자들의 부질없는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생각마저 갖게 한다.
물론 "국민정서법" "떼법"이 통하는 우리사회의 현실을 감안해 볼 때
무리한 주문일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변화와 발전은커녕 후퇴하는 정치행태는 참으로 걱정이
앞선다.
이대로 가다간 21세기에도 희망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자괴심마저 든다.
다행히 여.야 일각에서 해묵은 정치현안을 연내에 매듭짓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뉴밀레니엄 정치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중
이라고 한다.
여건 야건 정치적인 제스처가 아니라 철저한 자기반성의 기틀 위에서 진정한
마음으로 새출발을 다짐하는 약속이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거창한 수사의 나열이 아니라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사소한
일부터 챙기는 겸손함을 잃지말아야 할 것이다.
새 천년은 지금과는 다른 별세계가 아니라 오늘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며칠전 중학동창회에 초대된 학창시절의 은사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아 오면서 늘 강조해 온 말이 있다. 여러분들도 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세가지 부류가 있다. 첫째는 가르쳐주어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들은 우리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둘째는 가르쳐주면 알아듣는
사람이다. 평범하지만 사회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한다. 마지막 세번째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깨닫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여러분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는 사람들이 되어주기 바란다"
듣는 제자들도 50대 중반을 넘어선 장년들이었지만 열흘후면 아흔이
되신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학창시절보다 더 진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과연 나는, 우리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
손에 쥐어주어도 몰랐던 것은 아닌가.
알고도 행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는 않았는가.
자신에게 자문해 본다.
동시에 정치인들도 새 해를 맞기에 앞서 한번쯤 되새겨 보기를 권하고 싶다.
나라장래를 결정하는 우리 사회의 지도계층에 속하기 때문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4일자 ).
때가 때인 만큼 요즈음 가장 많이 거론되는 단어가 "새 해" "21세기"
"새 천년"이다.
제법 들떠 있는 분위기도 엿보인다.
그런데 새 해, 새 천년이 시작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편의상 구분해 놓은 시대의 명칭 이외에 당장 크게
달라지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요란스러운가.
의미를 찾자면 지난 천년과 20세기, 그리고 짧게는 지난 한 해를 되돌아
보면서 그동안의 잘못을 반성하고, 그 바탕 위에서 풍요롭고 희망찬 새 날을
일궈보기 위한 결의를 새롭게 해보자는 뜻일게다.
신문 방송 등 모든 매스컴에서 국가발전전략에서부터 우리사회의 잘못된
관행까지를 대상으로 "이런 것은 버리고 가자"는 캠페인이 러시를 이루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캠페인이 공연한 호들갑으로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사회의 상부구조를 형성하는 정치권의 요즈음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호들갑"이 아니라 "부질없는 헛소리"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의 대표들이 모였다는 "민의의 전당" 국회가 그동안 해놓은 일이
무엇인가.
지금 당장 기억나는 것은 여야간 당리당략을 앞세운 정쟁들뿐이다.
호피무늬 반코트를 소재로 한 옷로비, 언론문건을 둘러싼 공방, 그리고
최근엔 저질 발언사건 등등으로 밤낮을 지새고 있는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물론 부정부패의 근절과 정치권력의 도덕성 정립등을 위해 진실규명은
필요하다고 보지만 이젠 그같은 문제들이 춥고 배고픈 서민들에겐 한낱
사치스런 코미디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주고있다는 사실도 조금은 배려해야
할 시점이 됐다.
"제발 이제 그만..."하는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것을 결코 가볍게
보아넘겨선 안될 것이다.
그래도 새해 예산안 처리며, 각종 법안심의도 하지않았느냐는 반론도 없지는
않을 것같다.
과연 그런가.
본연의 임무인 입법활동을 보자.
수많은 민생관련 법안과 개혁법안들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고, 이해집단간의
의견대립이 있는 골치아픈 법안들은 심의자체를 기피하는 낌새도 없지않다.
또 일부 법안들은 특정집단의 이익만을 고려해 개악했다는 평가가 나와
대통령의 거부권행사가 거론되고 있는 판국이다.
국회활동에 대해 아무리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것이 요즘
분위기다.
이례적으로 연말 임시국회를 소집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가당찮은 정쟁으로
또 공전시키고 있으니 한심하기 이를데 없다.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는 비난도 나온다.
금세기 마지막 국회라는 의미를 부여한다면 더욱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요즈음의 정치판을 보면 정쟁을 지양하고 정책정당으로 거듭나기를 주문하는
것 자체가 학자들의 부질없는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생각마저 갖게 한다.
물론 "국민정서법" "떼법"이 통하는 우리사회의 현실을 감안해 볼 때
무리한 주문일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변화와 발전은커녕 후퇴하는 정치행태는 참으로 걱정이
앞선다.
이대로 가다간 21세기에도 희망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자괴심마저 든다.
다행히 여.야 일각에서 해묵은 정치현안을 연내에 매듭짓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뉴밀레니엄 정치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중
이라고 한다.
여건 야건 정치적인 제스처가 아니라 철저한 자기반성의 기틀 위에서 진정한
마음으로 새출발을 다짐하는 약속이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거창한 수사의 나열이 아니라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사소한
일부터 챙기는 겸손함을 잃지말아야 할 것이다.
새 천년은 지금과는 다른 별세계가 아니라 오늘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며칠전 중학동창회에 초대된 학창시절의 은사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아 오면서 늘 강조해 온 말이 있다. 여러분들도 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세가지 부류가 있다. 첫째는 가르쳐주어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들은 우리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둘째는 가르쳐주면 알아듣는
사람이다. 평범하지만 사회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한다. 마지막 세번째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깨닫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여러분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는 사람들이 되어주기 바란다"
듣는 제자들도 50대 중반을 넘어선 장년들이었지만 열흘후면 아흔이
되신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학창시절보다 더 진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과연 나는, 우리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
손에 쥐어주어도 몰랐던 것은 아닌가.
알고도 행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는 않았는가.
자신에게 자문해 본다.
동시에 정치인들도 새 해를 맞기에 앞서 한번쯤 되새겨 보기를 권하고 싶다.
나라장래를 결정하는 우리 사회의 지도계층에 속하기 때문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