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은 영화산업이 낳은 현대 호사가들의 우상이다.

못할 일이 없고 못가진 것이 없는 무소불위의 사나이다.

그는 동서고금의 무술에 통달해 있으며 항상 최신무기로 중무장돼 있다.

민첩한 행동만큼 두뇌회전도 빠르다.

거기에다 돈을 물쓰듯 하며 지구상 구석구석을 누비는가 하면 가는 곳마다
팔등신 미녀가 따르니 세계의 한량들이 부러워 할만도 하다.

여성들이 007에 품는 마음은 어떨까.

그것은 남성의 선망을 능가한다.

숀 코너리, 로저 무어, 그리고 현재의 피어스 브로스넌 등 역대 배역들이
보인 모습은 그야말로 "꿈의 남성상"이다.

그리스의 조각 같은 마스크에 후리후리한 체격, 그리고 무성한 가슴 털이
보이는 야성미는 여성들에게 한번쯤 안겨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만 하다.

거기에다 초인적인 완력으로 여성을 보호하는 기사도를 보이니 그에게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제임스 본드.

그는 60년대 냉전시대의 영국첩보원으로 등단한 후 30년넘게 18편의
007시리즈를 통해 확고한 이미지를 심었다.

전작 이름 "네버 다이" 그대로 그는 결코 죽지 않으며 늙지도 않는다.

초기 배역 숀 코너리는 이제 7순이 돼 노인장이 됐지만 후계자들이 뒤를
이으며 영원한 청년첩보원으로 남아 뭇 여성팬들을 뇌쇄시키고 있다.

19번째 007영화 "언리미티드"는 제명처럼 끝없는 본드의 건재함을 보여준다.

원제는 The World Is Not Enough 인데 이를 무시하고 다른 영어명칭을 붙인
이유를 모르겠다.

"세상은 아직도 손 볼 곳이 많아"쯤으로 붙였으면 좋으련만...

중동유전의 송유시설 독점권을 둘러싼 음모를 분쇄한다는 내용인데 원유가
상징하는 끈적거림이 검은 음모와 미묘한 대조를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007배역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데 그의 상대역인 본드 걸은
끊임없이 바뀐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본드의 지조없음을 문제삼는 여성 팬이 있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하긴 본드의 매력은 수많은 여성을 섭렵하는 바람기에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에게 "다이 하드"의 주인공(브루스 윌리스)처럼 조강지처가 있었다면
그의 인기는 오래전에 끝났을 것이다.

"언리미티드"의 본드 걸은 이례적으로 둘인데 모두 막상막하의 팔등신이다.

영화는 도덕논쟁을 피하려 했는지 막판에 대부호 상속녀를 밀어내고 핵무기
박사만 남겨 007의 품에 안긴다.

민완첩보원에 핵물리학박사 애인이라니...

상식밖의 짝맞추기로 보이지만 여류학자를 총잡이의 침대에 눕힌 것은
서양식 평등사상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하다.

본드에겐 여성말고도 변함없는 동료가 한사람 있다.

첨단장비를 도맡아 공급하는 Q라는 기술자.

"언리미티드"까지 17차례나 이 단역을 맡은 데스몬드 르웰린이 지난 19일
비명횡사했다.

85세의 고령에 영국시골길을 질주하다가 자동차충돌을 일으켰다는데 그 역시
007같은 인생을 살았다 하겠다.

< 편집위원 jsrim@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