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알고 봅시다] '어제사도세자묘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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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상 가장 비운의 세자인 사도세자.
많은 사람들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이유를 그의 정신병
때문이라 믿고 있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근거로 삼았왔던 탓이다.
하지만 역사학자 이덕일 박사는 "한중록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여인이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게 아니라 사건이 있은 지 40년이 지나 자신과 몰락한
가문을 변명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도세자가 "군사정변" 혐의로 고변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엇갈리는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과 아버지 영조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묘지문이 2백50년만에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68년 서울 휘경동에 사는 이종만씨가 기증한 "어제
사도세자묘지문"을 이달의 문화재로 선정, 전시하고 있다.
이 묘지문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뒤 비통함과
서러움을 글로 남긴 것.
가로 16.7cm, 세로 21.8cm, 두께 2.0cm로 사각형 청화백자 5장에 나눠
기록돼 있다.
임금의 묘지문은 문장이 뛰어난 학자가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묘지문은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워서
받아 적게 해 짐의 30년 마음을 밝힌 것이니..."라며 영조가 직접 작성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영조는 묘지문에서 사도세자가 성군이 될 것을 기대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는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는데.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며 원통해 하고 있다.
묘지문을 검토한 박광용 가톨릭대 교수는 "묘지문의 내용은 영조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묘지문의 발견 유례가 명확치 않아 진위여부를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 강동균 기자 kdg@ 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4일자 ).
많은 사람들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이유를 그의 정신병
때문이라 믿고 있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근거로 삼았왔던 탓이다.
하지만 역사학자 이덕일 박사는 "한중록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여인이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게 아니라 사건이 있은 지 40년이 지나 자신과 몰락한
가문을 변명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도세자가 "군사정변" 혐의로 고변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엇갈리는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과 아버지 영조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묘지문이 2백50년만에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68년 서울 휘경동에 사는 이종만씨가 기증한 "어제
사도세자묘지문"을 이달의 문화재로 선정, 전시하고 있다.
이 묘지문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뒤 비통함과
서러움을 글로 남긴 것.
가로 16.7cm, 세로 21.8cm, 두께 2.0cm로 사각형 청화백자 5장에 나눠
기록돼 있다.
임금의 묘지문은 문장이 뛰어난 학자가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묘지문은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워서
받아 적게 해 짐의 30년 마음을 밝힌 것이니..."라며 영조가 직접 작성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영조는 묘지문에서 사도세자가 성군이 될 것을 기대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는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는데.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며 원통해 하고 있다.
묘지문을 검토한 박광용 가톨릭대 교수는 "묘지문의 내용은 영조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묘지문의 발견 유례가 명확치 않아 진위여부를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 강동균 기자 kdg@ 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