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고 있는 컴퓨터는 아직도 386이다.

그리고 나는 이른바 386세대의 한 사람이다.

컴퓨터의 용량과 우리 세대에 붙여진 이름 사이의 이러한 연관이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개인적인 기억과 추측에 의지해 보건대 386컴퓨터가 나왔을 때가 90년대
초였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60년대생 또는 30대의 사람들을 묶어 386세대
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90년대 초반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386이라는 말 속에는 서로 상반되기까지
한 의미가 공존하고 있다.

286컴퓨터에 비해 386컴퓨터는 기술의 진보를 나타내는 "새로움"의 상징
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기종과 용량의 개발로 386컴퓨터는 이제 "낡음"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됐다.

반면 386세대라는 말은 신세대의 등장으로 극심한 문화적 변화를 맞이하던
90년대 초 신세대의 새로움에 대해 무언가 미심쩍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주로
회자됐다.

신세대의 탈역사적인 가벼움에 대해 386세대는 역사적인 진지함을 지닌
세대로 부각됐던 것이다.

거기에는 문화적으로는 다소 낡은 세대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세대
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기술적 진보와 정치적 진보가 반드시 비례하지 않았던 것처럼 386이라는
숫자 속에는 이러한 양측면에서 새로움과 낡음, 진보와 보수의 역전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386에 이어 486,586컴퓨터의 용량이 계속 경신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그리하여 386컴퓨터를 고수하고 있는 나같은 사람이 구닥다리로
취급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386세대라는 말의 위력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386세대라는 말은 90년대의 신화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학생운동권의 주역이 벤처기업가로서 성공한 예를 비롯 386세대가 부각되는
방식은 주로 일관성보다는 그 변신의 양상에 초점을 두고 있다.

물론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이에서 건강한 다리 역할을 하고 있고 변화된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점에서 386세대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말의 쓰임새나 위력은 정치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인 논리에 의해
포장되거나 불필요하게 증폭된 면이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획일적으로 고안된 그 이름 속에는 얼마나 상이한 삶의 경험과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일까.

도저히 하나로 뭉뚱그려 부를 수 없는 대조적인 인간형들을 단지 지난간
날들에 대한 향수에 기대어 미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막연한 향수와 더불어 386이란 숫자는 어떤 종류의 소속감을 요구하는
듯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386세대라고 부르는 것을 그리 즐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통분모라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획일적으로 그어진 금에 가깝기 때문이다.

원래 "세대"란 30년을 주기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즘은 쌍둥이도 세대 차이가 난다고 할 정도로 극심한 사회변화를
겪으면서 사실상 세대의 개념이 무색해져가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대의 명칭들이 범람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한창 신세대의 대명사로 X세대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얼마 안가서 Y세대
Z세대라는 말이 연이어 나오고 이제는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N세대라는
말이 익숙하게 쓰이고 있다.

새로움은 또다른 새로움을 급속하게 먹어치우며 스스로 낡아가는 형국이다.

그때마다 새로운 세대를 공략하기 위한 문화상품과 문화전략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 세대별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기보다는 그 유행의 중심에 놓여진 세대
중심으로 모든 문화구조가 독점되는 현상은 고질병이 되다시피 했다.

신세대를 표방하는 잦은 중심이동에도 불구하고 한켠에 여전히 건재한
386세대라는 말,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것이 어쩐지 기성세대가 내세우고
있는 궁색한 방패 같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또한 80년대에는 이념 또는 세계관을 통해 결속되었던 집단의 개념이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상업적인 전략에 따른 세대론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며칠 전 초등학교 3학년인 큰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내게 불쑥 물었다.

"엄마, 내가 무슨 세대인 줄 아세요?"

"글쎄..."

"P세대래요"

"왜 그렇게 부르는데?"

"포켓몬스터를 좋아하니까요"

일본 만화영화 포켓몬스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어린 눈동자들에게
그러한 이름을 붙여준 것은 대체 누구일까.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