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위기 민간은행 활용해 극복"..사카키바라 회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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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민간은행을 잘 끌어들여 외환부족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이겨냈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 대장성 재무관(게이오대 교수)은 24일자 요미우리
신문에 기고한 "국제머니의 공방"이라는 제목의 회상기에서 이같이 밝혔다.
한국경제 위기극복과 관련한 그의 기고내용을 간추린다.
-----------------------------------------------------------------------
한국의 경제위기는 97년에 들어오면서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1월의 한보철강 도산과 2월부터 시작된 기아자동차의 위기등을 계기로
급속도로 늘어 왔던 해외자금도 갑자기 유출로 반전됐다.
"아시아 위기"가 태국에서 인도네시아로 확산되는 가운데 9월부터는 한국
에서도 위기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국제투자가 조지 소로스씨로부터 "한국이 문제다"라는 귀띔을 받았을 때가
9월22일이었다.
실제로 그때부터 미국과 유럽이 앞서고 일본은행이 그 뒤를 따라 급속히
융자금을 빼내 가기 시작했다.
9월말부터 11월말까지의 2개월동안에만 한국 은행들의 대외채무는 1백23억
달러나 줄어들었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외환준비금을 은행에 예탁하는 방법 등을 통해
은행의 자금조달난이 금융시스템 전체를 위기로 몰아가는 사태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9월말 현재의 외환보유고는 2백11억달러에 불과, 한계가 드러났다.
11월말에 가서는 앞으로 1개월후의 자금조달 전망마저 불투명한 상태로까지
몰렸다.
11월6일부터 7일까지 자카르타와 워싱턴 등으로 출장을 간 차에 모교인
미시간대에서 미리 예정된 강연을 했다.
그런데 전부터 알고 지내던 박영철 고려대 교수가 그곳을 찾아왔다.
그는 대학교수지만 한국정부와 가까웠다.
한국정부의 의뢰를 받아 서머스 미국 재무부 부장관(당시)과 나에게 여러
가지 타진을 해왔다.
그의 부탁은 일본 단독으로 한국에 단기자금을 제공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미국 유럽의 민간금융기관들이 급속도로 한국에서 자금을
빼나가는 때에 일본만이 몰래 한국에 자금을 제공하더라도 효과는 의문
이었다.
10월의 인도네시아 지원을 둘러싼 교섭에서 IMF(국제통화기금)에 대해
불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AMF(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이 좌절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IMF를 통한 지원을 모색하는 것 뿐이었다.
일.한 양국간에 협조가 필요하다는데는 박 교수와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당시로는 불가능했다.
IMF로의 지원요청을 권유하고 현실적 프로그램이 마련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11월21일 한국이 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지원요청은 시장에서 "패배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인도네시아 등의 사례 때문에 IMF 지원프로그램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면서 한국의 원화환율이 하락했다.
한국지원 패키지는 12월3일 합의됐다.
금융지원은 총 5백50억달러에 이르렀다.
합의에도 불구하고 원화환율은 1주일만에 달러당 1천1백66원에서
1천5백33원으로 상승했다.
시장에서는 한국지원 프로그램에 의해 11월에 90억달러가 들어오나 자금
유출은 2백억~3백억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패닉상황이 확대
됐다.
구조개혁을 실시했으나 혼란이 가중됐다.
12월들어 시작된 IMF와 선진 7개국(G7)의 1일 외환상황 모니터링 결과 감소
페이스가 빨라졌다.
연내에 바닥에 이르고말 상황이었다.
일본 미국 유럽 등의 민간금융기관이 한국으로부터 융자를 빼내가는 것을
자제시킬 필요가 있었다.
12월 중순 민간은행에 대한 협력요청과 관련, 서머스부장관은 전화로 얘기
했다.
일본은 대형금융기관의 연쇄도산으로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은행에 협력을 요청할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 경제위기 때부터 채무문제 전문가로 인정받아온 친구
인 시티은행의 빌 로즈 부회장에 협력을 요청했다.
12월 중순부터 크리스마스에 걸쳐 G7간 전화회의를 수차례 열었다.
그 결과 민간은행의 사실상 채무상환연기를 조건으로 IMF와 세계은행 등이
자금을 앞당겨 지원키로 했다.
"제2선준비"인 2국간 지원 가운데 3분의 1 이상인 80억달러도 우선 지원키로
결정됐다.
최종적인 합의가 이뤄진 것은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이었다.
이날 일본금융기관을 대상으로한 한국은행 총재의 설명회가 도쿄에서
열렸다.
한국의 경제위기 대응은 민간금융기관을 잘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획기적
이었다.
한국의 경제위기 주원인이 은행뿐이었다는 점과 시티은행의 로즈 부회장,
뉴욕의 마크 워커 변호사 등 채무문제 전문가들을 활용한 것도 위기해결에
기여했다.
민간기관을 어떻게 끌어들일수 있을까.
21세기형 국제금융 위기극복을 위한 주요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 정리=김경식 도쿄특파원.kimks@dc4.so-net.ne.jp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5일자 ).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 대장성 재무관(게이오대 교수)은 24일자 요미우리
신문에 기고한 "국제머니의 공방"이라는 제목의 회상기에서 이같이 밝혔다.
한국경제 위기극복과 관련한 그의 기고내용을 간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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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위기는 97년에 들어오면서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1월의 한보철강 도산과 2월부터 시작된 기아자동차의 위기등을 계기로
급속도로 늘어 왔던 해외자금도 갑자기 유출로 반전됐다.
"아시아 위기"가 태국에서 인도네시아로 확산되는 가운데 9월부터는 한국
에서도 위기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국제투자가 조지 소로스씨로부터 "한국이 문제다"라는 귀띔을 받았을 때가
9월22일이었다.
실제로 그때부터 미국과 유럽이 앞서고 일본은행이 그 뒤를 따라 급속히
융자금을 빼내 가기 시작했다.
9월말부터 11월말까지의 2개월동안에만 한국 은행들의 대외채무는 1백23억
달러나 줄어들었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외환준비금을 은행에 예탁하는 방법 등을 통해
은행의 자금조달난이 금융시스템 전체를 위기로 몰아가는 사태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9월말 현재의 외환보유고는 2백11억달러에 불과, 한계가 드러났다.
11월말에 가서는 앞으로 1개월후의 자금조달 전망마저 불투명한 상태로까지
몰렸다.
11월6일부터 7일까지 자카르타와 워싱턴 등으로 출장을 간 차에 모교인
미시간대에서 미리 예정된 강연을 했다.
그런데 전부터 알고 지내던 박영철 고려대 교수가 그곳을 찾아왔다.
그는 대학교수지만 한국정부와 가까웠다.
한국정부의 의뢰를 받아 서머스 미국 재무부 부장관(당시)과 나에게 여러
가지 타진을 해왔다.
그의 부탁은 일본 단독으로 한국에 단기자금을 제공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미국 유럽의 민간금융기관들이 급속도로 한국에서 자금을
빼나가는 때에 일본만이 몰래 한국에 자금을 제공하더라도 효과는 의문
이었다.
10월의 인도네시아 지원을 둘러싼 교섭에서 IMF(국제통화기금)에 대해
불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AMF(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이 좌절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IMF를 통한 지원을 모색하는 것 뿐이었다.
일.한 양국간에 협조가 필요하다는데는 박 교수와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당시로는 불가능했다.
IMF로의 지원요청을 권유하고 현실적 프로그램이 마련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11월21일 한국이 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지원요청은 시장에서 "패배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인도네시아 등의 사례 때문에 IMF 지원프로그램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면서 한국의 원화환율이 하락했다.
한국지원 패키지는 12월3일 합의됐다.
금융지원은 총 5백50억달러에 이르렀다.
합의에도 불구하고 원화환율은 1주일만에 달러당 1천1백66원에서
1천5백33원으로 상승했다.
시장에서는 한국지원 프로그램에 의해 11월에 90억달러가 들어오나 자금
유출은 2백억~3백억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패닉상황이 확대
됐다.
구조개혁을 실시했으나 혼란이 가중됐다.
12월들어 시작된 IMF와 선진 7개국(G7)의 1일 외환상황 모니터링 결과 감소
페이스가 빨라졌다.
연내에 바닥에 이르고말 상황이었다.
일본 미국 유럽 등의 민간금융기관이 한국으로부터 융자를 빼내가는 것을
자제시킬 필요가 있었다.
12월 중순 민간은행에 대한 협력요청과 관련, 서머스부장관은 전화로 얘기
했다.
일본은 대형금융기관의 연쇄도산으로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은행에 협력을 요청할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 경제위기 때부터 채무문제 전문가로 인정받아온 친구
인 시티은행의 빌 로즈 부회장에 협력을 요청했다.
12월 중순부터 크리스마스에 걸쳐 G7간 전화회의를 수차례 열었다.
그 결과 민간은행의 사실상 채무상환연기를 조건으로 IMF와 세계은행 등이
자금을 앞당겨 지원키로 했다.
"제2선준비"인 2국간 지원 가운데 3분의 1 이상인 80억달러도 우선 지원키로
결정됐다.
최종적인 합의가 이뤄진 것은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이었다.
이날 일본금융기관을 대상으로한 한국은행 총재의 설명회가 도쿄에서
열렸다.
한국의 경제위기 대응은 민간금융기관을 잘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획기적
이었다.
한국의 경제위기 주원인이 은행뿐이었다는 점과 시티은행의 로즈 부회장,
뉴욕의 마크 워커 변호사 등 채무문제 전문가들을 활용한 것도 위기해결에
기여했다.
민간기관을 어떻게 끌어들일수 있을까.
21세기형 국제금융 위기극복을 위한 주요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 정리=김경식 도쿄특파원.kimks@dc4.so-net.ne.jp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