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한 외국인은 며칠전 본국의 어머니로부터 크리스마스선물로
커다란 소포를 받았다고 했다.

내용물은 성탄절쿠키.

멀리 타국에서 생활하는 아들 내외와 손주들을 위해 갖가지 모양으로 만든
과자였다.

이 외국인은 요즈음 그걸로 아침식사를 대신한다며 즐거워했다.

이런 예가 아니더라도 크리스마스선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얘기는 많다.

머리카락과 시계를 팔아 서로의 선물을 장만하는 가난한 부부얘기를 담은
오헨리의 "현자의 선물"은 대표적인 예거니와 구두쇠 스쿠루지영감의 회개를
다룬 찰스 디킨즈의 "크리스마스 캐롤" 또한 성탄절의 참뜻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IMF터널을 지나며 누군가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잃은 탓일까,
한국복지재단의 후원자수는 97년말을 정점으로 줄어들고 지체장애아
보호시설이나 양로원에 대한 작은 온정마저 끊겨간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부에 인색한 건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래도 미국에선
성인 90%이상이 정기 기부금을 내는데 우리는 10%도 안된다는 통계는
서글프다.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에 나오는 황금왕자상은 자신의 몸에서
사파이어와 루비 순금을 차례로 떼내 제비로 하여금 헐벗고 고통받는
사람에게 전한다.

심부름을 하느라 제비는 얼어죽고 왕자 또한 초라한 모습이 되어 버려지지만
둘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가지"가 된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천사 미하일은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스스로를 보살핌으로써가 아니라 사랑,
그것도 더불어 나누는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오헨리의 "현자의 선물"은 이렇게 끝난다.

"마지막으로 요즈음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선물을
주고 받는 모든사람들 중에서 이 두사람이 가장 현명했다는 것을".

가족을 위해 직접 과자를 만드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해를 보내며 가까운 이들에게 정다운 글을 곁들인 카드를 띄우는 가슴은
얼마나 포근한가.

눈내리는 날 행여 추위와 굶주림에 떨 이들을 생각하며 자기몫을 줄여 작은
선물을 마련하는 손길은 진정 얼마나 따사로운가.

크고 번듯한 선물이 아니면 어떠랴.

20세기의 마지막 성탄절날, 떡이라도 좀 들고 힘겨운 이웃들을 찾아나섰으면
싶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5일자 ).